토니 블레어 “내 코가 석자”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
  • 승인 2003.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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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침공 밀어붙이다 ‘총리 갈아치우기’ 역풍 맞아
누가 무어라 해도 이라크를 침공해 점령하겠다던 부시 정부의 초강경파가 사면초가다. 유엔에서 벌어지는 외교 전쟁에서는 독일·프랑스의 전쟁 반대 노선이 호응을 받고 있고, 유엔 밖에서는 누구도 예상 못한 반전 물결이 세계 곳곳에서 넘치고 있으니 말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2월19일, ‘미국이 홀로 후세인 정권을 갈아치우려고 하다가는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며 이례적으로 이라크 침공을 경고하는 글을 실었다. ‘이라크는 세계 안보를 위협하는 것도 아닌데 미국이 이라크에만 몰두해서는 곤란하다. 유엔 무기 사찰단에게 몇 달 더 시간을 주자. 이미 미군이 페르시아 만에 대량 투입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이렇게 말한 이는 브레진스키. 그는 한때 백악관의 안보보좌관이었고 ‘체니-럼스펠드 사단’에게는 미국의 21세기 세계 전략을 전수한 ‘강경파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발언은 부시 정부가 이라크에서 체면을 살리고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는 충고로 들린다. 브레진스키마저 이라크 침공을 머뭇거리게 된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영국의 블레어 정부가 곧 무너지고 어쩌면 그 충격이 이라크 침공을 어렵게 만들 정도로 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것이다.


최근 영국 언론은 진보-보수 계열을 가리지 않고 블레어에게 불길한 논평들을 쏟아내고 있다. ‘정권 교체가 다가온 곳은 바그다그말고도 런던’(<가디언> 2월 11일). ‘잠 못 이루는 블레어, 블레어와 그의 참모들 악몽에 시달려’(<파이낸셜 타임스> 2월13일). 이런 제목이 붙은 논평들은, 영국 시민 10명 가운데 9명이 반대하는 전쟁을 블레어가 포기하지 않아서 원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디펜던트>는 2월13일, 전쟁 반대를 공식으로 밝힌 여당 노동당 의원들과 장관들을 소개하면서 ‘블레어는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노동당이 무너지는 것부터 걱정하라’고 충고했다.


노동당에서 블레어 반대 노선이 처음 고개를 든 때는 지난해 12월. 그 무렵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당내 좌파 의원들로부터 총리는 물론 당수 자리에서도 물러나라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터져 나왔고 때마침 ‘셰리 게이트’라 불리는 스캔들이 블레어 반대 여론에 불을 지폈다. 셰리 게이트란 블레어 부인 셰리가 호주 사람 페터 포스터를 중간에 끼워넣어 개인 저택을 헐값에 사들인 사건을 말한다. 셰리는 이 사건이 보도되자 없던 일이라고 우기더니 며칠 만에 “언론 보도가 사실이며 개인적으로 책임지겠다”라고 고백했다. 포스터와 주고받은 전자 메일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포스터는 영국·미국·호주에서 감옥살이를 했던 전과자이며 그가 영국에서 추방되는 것을 막으려고 내무장관에게 압력을 넣은 인물이 셰리라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엎친 데 덮친 ‘셰리 게이트’


셰리가 전과자를 감싸고 돈 배경에는 그녀의 둘도 없는 여자 친구라는 라이프 스타일 전문가 캐럴 캐플린이 있다. 캐플린은 한때 포르노 모델이었고 영국 국회에서 ‘위험 집단’으로 분류한 뉴에이지 계열의 섹스 클럽 회원이었다. 셰리는 포스터가 캐플린의 애인이어서 알게 되었고 또 그래서 돕게 되었다고 했는데, 변호사로 품위를 지키고 있던 셰리가 법망을 피해 가며 전과자와 공모해서 사기극을 벌여 영국 국민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이런 엽기극의 내막이 하나하나 치밀하게 폭로될 때마다 블레어가 입은 상처는 컸다. BBC는 2월20일, 셰리 게이트를 추적한 한 시간짜리 기록 영화를 방영했는데, 포스터가 던진 한마디 “블레어 정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라는 말이 흥미롭다.


이 말이 빈말이 아니란 듯이 노동당 의원 앨리스 마온은 2월17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당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문제를 토론하고 있다고 말했다. 블레어를 반대하는 움직임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권 교체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 공개된 것이다. ‘우리는 블레어를 쓰러뜨린다’. <데일리 미러>는 2월18일, 이런 제목 밑에 ‘반전 의원들, 총리 갈아치우기 음모중’이라는 부제를 달고 이 음모를 주동하고 있다는 의원의 발언을 소개했다. “이런 움직임은 노동당뿐만 아니라 노조 지도부도 지지하고 있다. 권력 투쟁에 승리할 만큼 충분한 지지자를 확보했다. 노동당에서는 블레어 시대가 끝났다는 의견에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최근 들어 블레어가 이토록 수세에 몰린 것은 자료 표절 사건 때문이다.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증거를 댄다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이 2월5일 안보리에서 인용한 영국 문서가 미국 대학생의 12년 전 리포트를 표절한 것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국회의원들은 해명을 요구했다. 국회에서는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문제를 눈앞에 두고 세계를 기만하는 음모를 꾸몄으니 블레어는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원성이 터져 나왔다. 영국-미국이 내놓은 이라크 결의안은 표절 사건의 여파까지 겹쳐 안보리 회의에서도 차가운 반응을 받았다. 그 다음날 2백만 명이 모인 런던·글래스고 반전 시위는 블레어를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이 날 글래스고에서 열린 상반기 전당 대회에서 블레어는 예정과 달리 4시간이나 앞서 연설을 하고는 시위대가 몰려오기 전에 황급히 사라졌다.


보수 권력층 사이에도 반전 분위기가 대세


영국 여론을 주도하는 <타임스>는 2월20일 논평에서 반전 시위 대열에 못지 않게 블레어를 위협하고 있는 또 다른 세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 세력이란 ‘반전 시위 대열에 섞여 들어간 일이 없고 시위 주도자들과는 수십년 동안 맞서온’ 보수 세력이다. 이들은 수백만 명의 시위대, 노동당 내부 반란군과는 비교가 안되는 소수이지만 영국 사회의 상층부를 틀어쥐고 있는 권력층이기도 하다. <타임스>는 이들 보수 권력층 가운데 이라크 침공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하고 전 외무장관 더글러스 허드를 예로 들었다 “여론은 이라크 전쟁을 해방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파괴적인 반응을 불러올 것이다. 우리는 6일 만에 승리할 수 있지만 여섯 달 만에 패배할지 모른다.”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영국 보수층 가운데는 왕실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찰스 왕세자는 2월 말로 예정된 미국 방문이 무산된 후 파리를 방문해 시라크와 만났다. 그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후에 벌어진 일이다.
블레어가 거리의 시위대부터 영국 왕실에까지 확산된 반전 요구를 외면하고 이라크 침공에 가세하면 그 때부터 예상되는 사태는 총파업이다. 2월15일, 런던 시위 주최측은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총파업 준비를 호소했다. 노동당과 노조가 준비하고 있다는 블레어 몰아내기 작업은 그때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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