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북아 핵 벨트’ 꿈꾸나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
  • 승인 2003.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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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신기남 의원은 최근 내내 착잡한 심경이었다. 지난 3월5일자 <워싱턴 포스트>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사 내용을 접하고부터다. ‘미국 정부가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 의혹으로만 여겨온 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 2월14일 워싱턴. 일리노이 주 출신 마크 커크 공화당 하원의원 사무실. ‘북한 핵 관련 국회대표단’(단장 이 협 의원) 일원이었던 신의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해도 영토 안에서만 가지고 있다면 미국도 어쩔 도리가 없다. 다만 영토 밖으로 유출해 다른 불량 국가나 테러 집단에 판매하려 할 경우에는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 젊고 진보적인 의원은 거침이 없었다. 워싱턴에 가고 나서부터 막연하게 의심해온 신의원에게 마치 ‘더 고민하지 마라. 사실이니까’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떠날 때만 해도 워싱턴은 북한 선제공격론으로 떠들썩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미국에 가보니 일부 언론들이 나서서 주먹을 휘두를 뿐 정작 책임 있는 당국자들은 북한에 대한 공격을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이나 북한 핵 문제의 시급성을 떠들 뿐 공화당 의원들은 마치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마크 커크 의원의 얘기는 이런 ‘사태’의 하이라이트였다. 미국이 만에 하나 북한 핵을 용인하는 쪽으로 간다면 우리는 결국 어떻게 되나. 이런 의문이 워싱턴을 다녀온 뒤 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국내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미국이 북한 핵을 용인할 것이라는 보도는 곧바로 다른 이슈들에 묻혀 버리는 분위기이다. 백악관이 서둘러 사실 무근이라고 진화했고, 또다시 미국의 한반도 주변 무력 증강 소식이 지면을 장식했다. 국내의 안보 전문가들 역시 ‘믿기 어렵다’는 투다. 미국 사정에 밝은 한 전문가는 “부시 대통령 성격상 북한 핵을 그냥 놔둘 리가 만무하다.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군 정보기관의 고위 관계자는 오히려 ‘공격 준비 완료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런 얘기 자체가 함정일 수 있다. 북한이 핵 개발을 완료하는 순간 미국은 독자 행동하는 명분으로 이를 활용할 것이다”라며 경계심을 보였다.


파월 국무장관이 중국에서 푸대접 받은 까닭


그런데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올해 2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푸대접받았던 사실을 이 문제와 연결해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동안 미국은 북한 핵 문제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이 지역 국가들의 공통 문제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북한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파월 장관이 ‘기세 등등하게’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은 ‘미국이 알아서 하시라’는 태도를 보이며 ‘차만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요컨대 미국이 북한 핵 문제 해결 책임을 중국에게 떠넘기려 하자, 중국이 짜증을 낸다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마크 커크 의원의 발언 행간에도 잘 드러나 있다. “미국은 급할 게 없다. 북한이 핵을 갖고 있어도 미국 본토까지 미사일을 쏘아보낼 능력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다르다. 북한의 핵무장은 곧 일본의 핵무장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북한 핵 문제는 동북아 지역의 문제’라며 이렇게 설명했던 것이다.


모두 진실의 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 말들이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과연 미국이 그동안 유지해온 ‘레드라인’(금지선) 정책을 바꾸었는지, 바꾸었다면 언제,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핵 연료봉 재처리를 레드라인으로 삼아 왔다. 즉 북한이 재처리를 감행해 핵물질을 추출하면 응징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얘기들은 중동 국가들이나 테러 단체에 수출만 하지 않으면 봐주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레드라인이 핵무기 수출 금지 쪽으로 후퇴한 셈이다.


만약 이런 정책 변화가 일어났다면 왜일까.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그 경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이 레드라인을 변경한 것은 사실이며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북한이 핵개발까지 안 가리라고 보고 재처리를 레드라인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로 치달을 것이라는 움직임을 포착했다. 이에 따라 백악관·국무부·국방부·중앙정보국 등의 정보기관으로 이루어진 ‘한반도 특별대책팀’이 대응 방안을 검토하던 중 원래의 1안이 아닌 2안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가 말하는 2안은 바로 레드 라인 후퇴를 의미한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핵무기 개발을 막을 방법은 전쟁밖에 없는데 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당국자들, 연말부터 ‘레드라인’ 후퇴 암시


그렇다면 북한은 왜 최근 들어 핵개발 강행 쪽으로 선회했나. 한국에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미국이 북·미 대화 요구를 들어줄 기미가 없고, 북한붕괴론·선제공격론 등을 계속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문가들 중에는 그가 ‘2안’이라고 언급한 것이 실상은 미국의 ‘1안’이었지 않느냐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동국대 이철기 교수는 “지난해 10월 핵 문제 발생 이후 미국의 조처들을 보면 마치 북한이 핵개발에 들어서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라고 꼬집었다.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지자마자 무엇이 그리 급한지 대화 중단, 중유 공급 중단 등 자극적인 조처를 취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손만 대면 가능한’ 플루토늄형 핵폭탄 개발 유혹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국이 중국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북한이 대화 상대로 지목한 것은 처음부터 미국이지 중국이 아니다. 더군다나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양빈 사건, 탈북자 문제 등으로 최악의 상태이다.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미칠 여력이 거의 없다는 것을 미국이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중국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미 지난해 말께부터 미국 고위 당국자들이 레드라인 후퇴를 암시하는 얘기를 계속해 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30일 파월 국무장관은 방송에 출연해 ‘북한이 핵무기를 다른 나라로 수출할 경우가 바로 미국이 행동에 나설 시점’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1월 워싱턴을 방문한 서울대 이 근 교수 역시 마이클 그린 국가안보위원회(NSC) 아태담당관으로부터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다시 말해 부시 정부는 최소한 지난해 말부터 이미 ‘핵무장한 북한’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국내의 비판적 전문가들은 그동안 부시 정부의 미사일 방어(MD) 계획 추진과 관련지어 이 문제에 접근해 왔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게 간단히 설명하고 지나기에는 그 배경이 훨씬 복잡하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말께부터 국내 정보 소식통들이 ‘북한 핵 문제는 결국 파키스탄 모델로 귀결하게 될 것’이라고 관측하기 시작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얘기의 진원지는 지난해 11월 초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에 왔던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였다. 당시 그가 국내 인사들과의 비공식 모임에서 북한 핵 문제의 전망과 관련해 “파키스탄 모델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한 얘기가 은밀히 전파되었던 것이다.


그레그가 언급한 파키스탄 모델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24쪽 딸린 기사 참조). 중요한 점은 파키스탄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개발에 성공했고, 미국도 이를 묵인하는 정책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또한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인도의 핵개발과 맞물려 남아시아 일대에 핵 확산 도미노 현상을 불렀다.





“파키스탄 모델도 배제 못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알 수 없지만 지난 1월6일 워싱턴의 케이토 연구소는 ‘남아시아 현상의 동북아판’을 부추기는 듯한 주장을 펼쳐 관심을 끌었다. 이 연구소의 테드 갤런 카펜터 국방 및 외교정책 연구담당 부소장이 ‘(북한 핵에 대한) 미국의 최선의 전략은 주한 및 주일 미군을 줄이고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것이다.
“당시 그의 주장을 보면서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 전 국내 한 일간지에 ‘북한의 핵 보유가 일본의 핵무장으로 이어져 결국 동북아시아가 남아시아와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글을 기고한 이종원 교수(일본 릿교 대학·국제정치)는 최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카펜터 부소장의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지난해 말 이후 일본을 방문해 일본의 미사일 방어(MD) 계획 참여와 핵개발을 부추겨온 미국 고관들의 발언과 맥을 같이한다. 얼마 전 방일한 윌리엄 코언 전 미국 국방장관이 북한 핵을 근거로 일본의 미사일 방어 참여를 재촉했으며, 지난 2월에는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까지 나서 일본의 핵개발 비밀 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을 ‘예견’했다. 마치 일본에 핵 논의 불길을 지피려는 듯한 발언이 꼬리를 물었다.


그는 ‘일본의 핵무장은 결국 미·일 안보 동맹 약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존 통설은 “이미 고전이 돼 버렸다”라고 일축했다. 일본이 설사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제에 포섭되어 있으면 독립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의 핵개발 추세는 과거와 같은 전략 핵이 아니라 소형 핵(미니 뉴크)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그 근거 중 하나이다.


일본의 핵무장은 곧 한국의 핵무장, 그리고 타이완의 핵무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 미국이 이들 국가들을 미사일 방어 체제로 묶을 수만 있다면 미국은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핵으로 무장한 동맹국들을 ‘통제’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무엇을 위한 통제인가. 이교수는 2001년 5월 발표된 ‘랜드 보고서’ 내용을 거론했다. 즉 미국은 ‘21세기 미국의 주적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기존 한·미, 미·일, 미·호주 등의 양국 동맹 관계를 일종의 집단안보체제 (Coalition of the willing)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원하는 국가에 한해서’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이는 결국 기존 아시아 동맹국들을 ‘반 중국 포위 노선’으로 재결집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1996년 미·일 신안보조약 체결 이후 은밀하게 거론되어 온 ‘아시아판 나토’ 체제 구축 문제가 미사일 방어 체제와 핵을 대동하고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의 푸들’ 일본은 최근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제를 그대로 수입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함으로써 발 빠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올해 들어 갑자기 불거진 주한미군 지상군 감축 및 전환 배치 움직임의 배경에는 이런 거대한 압력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양국 국방부가 주관해 4월부터 시작될 ‘한·미 미래동맹구상회의’ 등에서 미국은 물을 것이다.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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