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새긴 ‘낙서’ 인생의 족쇄 되었네
  • 부에노스아이레스·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4.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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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젊은이들, 문신 후유증 심각…결혼·직장 생활 곤란 겪기도
10년 가까이 아르헨티나 등 남미 젊은이들 사이에 몰아쳤던 문신 유행이 이제 정반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들어 문신을 지우려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근 아르헨티나 피부과학 전문지에 실린 아르헨티나 국립화상병원 정형외과 의료진의 보고서 요지다.

12월 바캉스철을 코앞에 두고 군살 빼기에 골몰하는 아르헨티나 젊은이들에게 이같은 보고서는 하나의 경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름이면 아슬아슬한 비키니만으로도 부족해 허연 살에 온통 문신을 새겨온 젊은 여성들에게는 특히 ‘위협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9년과 2000년 문신 제거 상담을 위해 국립화상병원을 찾은 경우는 44건·40건에 불과했다. 그런데 2002년에는 3백15건으로 급증했다. 2003년에는 2백7건으로 수치상으로는 감소했지만 이 병원 의료진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밀려드는 환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상담 횟수를 매주 5건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다니엘 세바스티안이라는 상담 환자는 열일곱 살 때 무시무시한 초록뱀 그림을 팔에 새겼다. 당시 그는 자신의 뱀 문신을 누구에게나 보이고 싶은 자랑스런 예술 작품으로 여겼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오늘날 문신은 혐오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고심 끝에 문신을 지우기로 하고 병원을 찾았지만 담당 의사는 수술 결과를 장담하지 못했다. 온 팔을 칭칭 감고 손등에 이르러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 그림은 아무리 보아도 끔찍하기만 했다. 그는 의사를 붙잡고 ‘우선 뱀 대가리만이라도 없애 달라’고 애원했다. 이것은 보고서에 들어 있는 문신 관련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다.

“뱀 대가리만이라도 없애주세요”

“한때의 호기심과 과시욕으로 젊은이 대부분이 문신을 하지만, 막상 나이가 들어 문신이 보기 싫어지면 생각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전문의들은 말한다. 왜일까. 우선 문신을 제거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사설 병원에서 문신 제거 수술을 받을 경우, 통상 8백 페소(약 30만원)가 든다. 아르헨티나 생활 수준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액수다.

수술한 뒤 흉터가 남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문신은 없애더라도 피부에 남는 흔적은 완벽하게 지울 수 없다. 전문의들은 어릴 적 예방주사 자국이 성장하면서 더 크게 번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보고서는 문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도 지적하고 있다. 철이 들어 직장을 갖고 사회 활동을 할 때 문신의 존재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형사 소송 전문 변호사의 경험담이 있다. 이 변호사는 한창 철없던 시절 온몸에 용무늬를 새겼다. 변호사 직업을 가진 뒤 말썽이 났다. 대부분 범죄 피해자인 고객들이 그의 문신을 보면서 질겁을 하거나 범죄 집단과 혹시 한패거리가 아닌가 의심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병원을 찾아 레이저로 문신을 제거했지만, 문신 자국마저 지우지는 못했다.

“문신 새기다 에이즈 감염될 수도 있다”

아르헨티나 피부학회 회장을 지내고 지금은 한 유명 병원의 피부과 책임자인 칼로스 페르난도 가티 박사는 문신의 메커니즘을 잘 안다. 그 역시 ‘문신에 대한 사회의 거부감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가티 박사가 행했던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신 시술 경험자의 약 20%가 18~24세에 문신을 새긴 것으로 나타났다. 가티 박사는 “젊은이들 사이에 문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10년 전부터다. 그때 문신한 청소년은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으로 활동할 것이고, 이들 대부분은 문신을 거부하는 사회 분위기를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문신으로 인한 사회적 고통은 직장 생활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모델 뺨치게 멋쟁이인 한 여성은 요즘 결혼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다. 유명 기업의 중역과 결혼을 약속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어깨뼈 주위에 새겨넣은 장미꽃 문신 탓에 결혼 예복은 아예 입을 생각을 접은 것이다. 상류 사회에 자신의 문신을 과감하게 드러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문신은 보건 문제와도 직결된다. 문신 제거를 ‘칠판 지우기’ 정도로 생각하는 일반 인식과 함께, 당국의 관리 감독을 받지 않은 문신 시술이 성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신 시술 기구나 약품에 대한 위생 관리가 전무해 문신 시술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일’만큼이나 위험천만해지고 있다. 문신을 새길 때 흐르는 피는 에이즈의 감염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한쪽에서는 이처럼 문신 지우기가 시작되었다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문신 새기기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두달 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한 문신 관련 행사에는 무려 1만명의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한 문신시술소에는 요즘도 하루 2백명씩 고객이 줄을 서고 있다.

문신 관련 사이트도 성업 중이다. 각 사이트가 전시한 무늬도 각양각색이다. 실제 시술된 사진들은 그야말로 ‘작품’이다. ‘보디 아트’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아르헨티나에서 흔히 보이는 문신은 전신 문신보다는 손수건에 수를 놓은 듯한 작고 섬세한 그림들이다. 특히 비키니를 입거나 많이 파인 옷을 즐겨 입는 여성들이, 드러난 신체에 살짝 ‘엑센트’를 주기 위해 문신을 한다.

문신이 현대 사회에 본격 유행한 것은 펑크·록 등 대중 음악이 등장했던 시기와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 문신의 기원은 2천여 년 전 이집트의 종교 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르헨티나에서 문신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문신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회용 문신 스티커가 어린이용 유제품에 판촉용 경품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여름철이 되면 특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문신 열기가 뜨거워진다. 영구적으로 문신하는 대신 1회용 스티커 문신으로라도 맨살을 가려야 직성이 풀린다. 아메리카 본토인이나 일본 사무라이들은 호신용이나 전투용으로 문신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나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아르헨티나의 마르델플라타 등 대서양 연안의 해변을 누비는 젊은 여성들의 문신 용도는 좀 다른 데 있는 듯하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비키니만으로는 달랠 수 없는 노출욕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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