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패닉 민심 노린 ‘정치적 간택’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4.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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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난민 출신 구티에레스를 상무장관에 지명한 부시의 속셈
‘트럭 운전사에서 장관으로.’ 꿈 같은 얘기가 아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 의해 지난 11월29일 상무장관으로 지명된 카를로스 구티에레스(51)가 바로 꿈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쿠바 난민 출신인 그의 현재 직함은 아침식사 대용 곡물 식품인 시리얼을 만드는 굴지의 회사 켈로그 사의 회장. 그는 미국 내에서 히스패닉 기업인으로는 가장 출세했다는 평가를 들어온 사람이다.

내년 1월 2기 행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내각 개편에 착수한 부시 대통령이 히스패닉 인사를 각료에 임명한 것은 구티에레스가 두 번째다. 부시는 지난 11월2일 실시된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직후, 지난 4년간 자신의 법률 고문을 지낸 알베르토 곤잘레스를 법무장관에 지명한 바 있다. 멕시코 출신인 곤잘레스와 쿠바 출신인 구티에레스의 입각을 놓고 벌써부터 워싱턴 정가에서는 미국내 최대 소수 민족 이민자로서 각종 선거에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히스패닉을 의식한 정치적 동기가 깔린 것이 아니냐는 소리마저 들린다.

부시는 상무장관 지명과 관련한 기자 회견에서 구티에레스를 가리켜 “마이애미의 한 호텔에서 벨보이를 하며 영어를 배웠으며, 볼품없는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기업 총수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미국의 성공담이다”라고 한껏 치켜세웠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인생 역정은 한편의 드라마다. 부친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파인애플 수출 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업가였지만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뒤 하루 아침에 전재산을 몰수당했다. 이듬해 그의 부친은 당시 여섯살배기였던 구티에레스를 데리고 미국행 이민 길에 올랐다. 1966년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몇년 뒤 부친을 따라 다시 멕시코로 이주했다. 그 후 켈로그 사 현지 공장에 취직해 사회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위대한 미국의 성공담”으로 치켜세워

구티에레스는 입사 초기 물건을 실어 나르는 말단 트럭운전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취직한 지 10년 만에 켈로그 사 멕시코 주재 영업책임자로 승진할 만큼 남다른 수완을 발휘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승승장구하던 그는 멕시코는 물론 캐나다의 켈로그 사 영업망을 총괄하는 이사로 승진했고, 1999년 마침내 이 회사의 최고 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그는 최고경영자에 오른 지 4개월 만에 구조 조정을 이유로 미시간 주에 있는 주력 공장을 폐쇄해 종업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으나, 당시 결정 덕분에 침체의 늪에서 헤매던 켈로그 사 주가가 60% 이상이나 뛰어 초우량 기업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는 최고 경영자 시절 켈로그 사 제품이 진열된 슈퍼마켓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고객들의 취향을 현장 조사해 종업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런 경영 수완에 힘입어 켈로그 사 매출액은 그의 취임 당시 62억 달러에서 지난해에는 88억 달러로 껑충 뛰었고, 주가도 30 달러를 조금 웃돌던 것이 지금은 45 달러를 넘어선 상태다. 투자 회사 모건 스탠리의 켈로그 사 담당 분석가인 데이비드 에들먼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성장 동력을 잃은 볼품없는 회사를 관련 업계를 주도하는 성장 회사로 일군 주역이다”라고 평가했다.

물론 부시가 단순히 구티에레스의 이런 경영 수완을 높이 샀기 때문에 상무장관 직에 임명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구티에레스는 미국 내 수두룩한 초일류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에 비하면 애숭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부시가 굳이 그를 상무장관 직에 임명한 속내는 무엇일까.

히스패닉 잡아야 선거에서 승리한다

뉴욕 타임스는 구티에레스가 부시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정치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쿠바계 미국인 유권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플로리다 주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가장 빠른 인구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범히스패닉으로부터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기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부시는 지난 11월 대선 결과 히스패닉 유권자들로부터 2000년 대선 때보다 무려 11%나 증가한 44%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플로리다 주에서는 이들의 압도적인 지지 덕분에 그 주에 배당된 선거인단 27명을 확보해 승리의 발판을 굳힌 바 있다.

미국 인구통계국에 따르면 현재 미국 내 히스패닉 인구는 전인구의 14%인 4천만명에 달한다. 지난해 말 현재 이들은 이미 인구 수에서 흑인을 앞질렀다. 이들 가운데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는 약 1천6백만명으로 지난 10년 사이 56%가 증가했다.

1980년 대선 투표에 참여한 히스패닉은 미국 전체 유권자의 2.4%에 불과한 2백50만 명이었지만, 2000년에는 무려 6백만명으로 불어났다. 전국 히스패닉 유권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월 대선에 투표권을 행사한 히스패닉 유권자는 약 7백만명이다.

한마디로 앞으로는 미국 의회 중간 선거든 대선이든 히스패닉 유권자들을 붙잡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 부시가 미국 내 여러 소수계 가운데 왜 굳이 히스패닉 출신에서 장관을 2명이나 ‘간택’했는지 속내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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