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 있거라?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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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정착 ‘큰 걸음’…미국도 중재 노력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정상이 마침내 평화의 길목에서 손을 잡았다. 지난 1월 야세르 아라파트의 뒤를 이어 자치 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마흐무드 압바스와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총리가 지난 2월8일 이집트의 휴양지 샤름 알 셰이크에서 만나 정전을 선언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공격 행위를 중지하고, 이스라엘도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두 정상이 합의한 사항에는 폭력 종식 외에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몇 가지 전제 조건과 절차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먼저 신뢰 구축을 위한 조처로, 이스라엘에 있는 팔레스타인 수감자 5백명을 단계적으로 석방한다는 약속이 있다. 요르단 강 서안 다섯 도시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치안 업무를 팔레스타인 보안군에 넘기는 방안을 추후 논의하자는 제안도 있다.

양측 정상의 이집트 회동이 있기 전, 팔레스타인·이스라엘과 함께 ‘숙명의 삼각 관계’를 이루고 있는 미국의 조지 부시 2기 정부도 협상 성사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의 자리를 물려받은 콘돌리자 라이스는 취임 일성으로 ‘양측의 대화를 돕기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 역할 의무’를 강조했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지난 2월7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청사를 직접 방문해 ‘지금이야말로 평화 협상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시기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했다. 같은 날 라이스 국무장관은 다시 양측 보안 협정을 감시·감독할 특별조정관을 임명했으며, 팔레스타인 재건을 돕기 위해 앞으로 90일 이내에 4천만 달러를 지원한다는 ‘긴급 액션 프로그램’을 발표하기도 했다.

양측의 이번 정전 선언은 2001년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제2차 인티파다(봉기) 이후 악화일로인 양측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4년 전, 이스라엘은 강경파로 소문 난 아리엘 샤론이 집권하고 있었다. 이보다 6개월 전인 2000년 9월 샤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성지로 여기는 템플 사원을 전격 방문해(제2차 오슬로 협정 조인식 5주년) 팔레스타인인의 분노를 폭발시킨 바 있다.

이후 팔레스타인인은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해 자살 폭탄 테러까지 가하는 제2차 인티파다에 돌입했고, 이스라엘군 역시 민간인과 무장 세력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 작전으로 맞섰다. 상호 보복 행위의 결과는 참혹했다. 지난 4년간 3천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과 1천 명 가량의 이스라엘인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평화의 길은 멀고 험하다. 양측은 여전히 살얼음판 위에 서있다. 양측의 ‘폭력 종식’ 선언은, 말 그대로 선언일 뿐이며 구체화한 것은 현재까지 없다. 과거 양측은 전세계가 박수를 치는 가운데 ‘평화 협정’을 맺고서도,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다시 겨눔으로써 평화 재건 노력을 번번이 물거품으로 돌려놓은 전례가 있다.

이번에도 상황은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서도 특히 양측의 충돌이 빈번한 가자 지구에서는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양측 정상의 ‘정전 선언’이 있은 바로 다음날,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정착촌 부근에서 이스라엘군이 쏜 총탄에 팔레스타인인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날 양측 대표들은 실무급 회담을 열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돌발적인 불상사로 회담을 연기했다. 지난 2월10일에도 서안 지구의 한 검문소 부근에서 또 한 명의 팔레스타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보안방벽 건설 중단 등 과제 ‘첩첩’

가자 지구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팔레스타인의 강경파 무장 단체 하마스는 즉각 응징에 나섰다. 가자 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을 향해 수십 발의 박격포탄과 로켓포탄을 쏟아 부은 것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 공격은 이스라엘군의 도발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계속된다면, 하마스측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평화로 가는 길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처럼 오랜 적대감에서 비롯한 뿌리 깊은 불신이다. 팔레스타인 강경파는 양측 회동을 전후해, 자기네의 행동 수위는 오직 이스라엘군에 달려 있음을 강조해왔다. 즉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무장 세력 지도자에 대한 암살 행위를 중단하는 등 먼저 진지한 자세를 보여주어야, 비로소 무기를 내려놓을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임시 정부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는 이 사건 직후, 팔레스타인 보안 당국(가자지구 보안사령관 및 자치 정부 경찰 책임자)의 고위 책임자 3명을 직위 해제하고, 보안군에 대해 무장 공격 주동자를 색출하라고 명령했다. 이 날 해임된 보안 책임자들은 한결같이, 야세르 아라파트 생존 당시 그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아라파트 추종자들로서, 신생 압바스 정권을 견제하는 세력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측은 ‘전례 없는 조처’라고 치켜세우며 화답했고, 미국 또한 ‘압바스가 폭력과 테러 종식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고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신뢰 회복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평화 협상이 본론으로 들어갈 경우, 양측을 기다리고 있는 산적한 난제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 중 양측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당면 과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 정착민을 분리하고 팔레스타인인의 테러 공격을 막겠다는 구실로 서안 지구에 설치해온 이른바 ‘보안 방벽’ 건설을 중단하는 조처와 관련되어 있다.

보안방벽은 2002년 이스라엘군이 ‘테러와의 전쟁’을 구실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전격 재점령한 뒤 일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67년 이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분류되었던 일부 지역이 이스라엘 영토로 편입되었다. 방벽 설치를 구실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당 부분을 고립시키거나 잠식해 들어간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측이 평화 협상을 선언해놓고서도 이처럼 논란 많은 보안방벽 건설 작업을 강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평화단체 거쉬 샬롬은 2월11일 이스라엘 유력 일간지 하레츠에 이를 비난하는 공익 광고를 실었다. 즉 이스라엘군이 서안지구 내 남부 거점 도시 헤브론 남방에서 팔레스타인 정착민을 강제로 쫓아내며, 일종의 무단 점령 수단인 보안방벽 건설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쉬 샬롬은 이를 ‘궁극적으로 이 지역을 이스라엘에 합병하려는 예비 작업’이라고 단정했다.
양측 강경파 “상황 달라지면 언제든 무력 사용”

현재 미국과 이스라엘은 물론 팔레스타인 압바스 자치 정부에서조차 ‘폭력 종식’이 평화 협상의 전부인 양 관심을 집중하며, 이처럼 중대한 보안방벽 건설 작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 대다수는 이스라엘 당국의 이같은 태도를 ‘평화 노력을 가장한 기만 행위’라고 보고 있다. 이같은 행위를 용인하는 압바스 정부의 태도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비굴한 타협’으로 비칠 수 있다.

하마스·이슬람 지하드 등 팔레스타인 강경파는 압바스의 협상 노력을 아직은 판단을 유보한 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저들의 술수에 말려들고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이들의 총구는 언제라도 다시금 이스라엘을 정조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군부 역시 ‘팔레스타인 당국이 폭력 종식 방법을 잘 모른다면, 우리가 한 수 가르쳐 줄 것이다’라며 무력 사용을 신속히 재개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양측은 살얼음판 위에서 이제 막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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