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 녹색당 ‘큰 깃발’ 꽂다
  • 교토·이유진 (녹색연합 녹색평화국장) ()
  • 승인 2005.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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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 녹색 정치 네트워크 창립대회 참관기
독일에서는 녹색당 운동이 이미 뿌리를 내려 슈뢰더 총리와 녹색당 지도자 요시카 피셔가 연정 체제를 구성할 정도이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녹색당 운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곧 사정이 바뀔 것 같다. 이 지역 ‘녹색 전사’들이 국제 연대의 씨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월11일부터 2월13일까지 일본 교토에서 열린 국제 연대 행사에 직접 참가했던 녹색연합 녹색평화국 이유진 국장이 그 이유를 설명한 참관기를 보내왔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녹색당을 지향하는 정치 연대 모임인 ‘아시아 태평양 녹색 정치 네트워크’(APGN)가 지난 2월13일 일본 교토에서 창립되었다. 교토는 이 도시 이름을 딴 기후 변동에 관한 국제 협약인 교토의정서가 오랜 진통 끝에 공식 발효를 앞두고 있어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이 네트워크를 창립하기 위한 회의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23개국에서 3백여 명이 대표를 보냈다. 이들은 열띤 토론 끝에 아·태 지역에서 ‘녹색 자치’와 ‘녹색 정치’ 시대를 활짝 열어젖뜨릴 국제 연대 기구를 출범시켰다. 이번 총회에 한국에서는 초록정치연대와 환경단체 활동가 22명이 참가했다. 주최국인 일본은 녹색당 운동을 지향하는 무소속 지방 의원들의 모임인 ‘레인보 앤드 그린피스’에서 70 여 명이 참가했다.

녹색당, 전세계 80여 나라에서 맹활약

녹색당은 1970년 이후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를 중심으로 창당 움직임이 일어 지금은 전세계 80여 나라에서 활발한 정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단연 선도 국가다. “뉴질랜드 녹색당은 1990년 5월 창당했다. 현재 전체 국회 의석 1백20석 가운데 9석을 차지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비핵지대화와 유전자 조작 식품 금지 선언을 했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나라다.” 뉴질랜드 녹색당 이안 에웬 스트리트 의원의 연설 한 토막이다.·

그녀의 설명은 다른 나라 참가자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뉴질랜드는 현재 총리와 법무장관, 그리고 전체 국회의원의 38%가 여성이다. 이같은 설명과 함께 스트리트 의원이 ‘이러다가는 뉴질랜드 정계에서 중년 남성이 멸종 위기에 처할 것 같다’고 농담을 던지자 회의장에 웃음과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녹색당 바람이 대단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녹색당이 창당된 때는 1992년. 당시 논란이 일었던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의 프랭클린 댐 건설 반대 운동이 승리를 거둔 결과였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의 녹색당은 상원의원 4명, 주 의회 의원 15명, 지방자치단체장 80여 명을 배출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제외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녹색당 운동 성과는 미미하다. 이 지역에서 녹색당 이름으로 국회나 정부 각료를 배출한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바누아투·네팔 네 나라뿐이다. 한국·일본·타이완·몽골·파푸아뉴기니·파키스탄처럼 녹색 정치 세력은 있으나 아직 국회의원을 내지 못한 나라는 아홉 나라에 이른다. 인도네시아에는 30여 정당이 난립해 있지만, 녹색당은 없다.

녹색 정치 네트워크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이번 회의에서 토론된 내용을 살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이번 회의에서 집중 토론된 주제는 단연 기후 변화 대책을 둘러싼 에너지 문제, 그리고 평화와 지역 안보 문제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주요 에너지 공급원은 석유·석탄을 비롯한 화석 연료와 댐을 중심으로 한 수력 발전, 그리고 원자력 발전이다. 에너지 문제에 대한 녹색당의 해답은 재생 에너지이다. 태양·풍력·바이오매스·조력과 같은 재생 에너지를 이 지역에 뿌리 내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주요 논제였다.
미국의 군사 영향력 놓고 집중 토론

독일의 경우 녹색당 운동은 원자력 발전소 폐쇄와 에너지의 중앙집중식 독점 구조를 지방 분권으로 전환하는 데 힘을 집중하면서 세력을 결집할 수 있었다. 초록정치연대 정책위원 차명제 박사는 “재생 에너지는 단순히 에너지 공급 문제가 아니다. 정치 문제다. 재생 에너지 특성상 소규모 지역 전력 생산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권력 분산과 에너지 자립을 의미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곧 분권과 풀뿌리 자치를 지향하는 녹색당의 이념과 상통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재생 에너지를 보급하는 문제는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아시아 지역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교토의정서 공식 발효일(2월16일)을 코앞에 둔 시점에 열린 회의여서, 교토의정서 비준을 거부하고, 석유 확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국에 대한 비판은 어느 때보다 거셌다. 2월12일에는 참가자 전원이 교토 거리에서 행진했고, ‘석유가 아닌 태양을 통해 평화의 길을 가자’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결의문에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바닷물에 가라앉고 있는 폴리네시아 대표의 절절한 호소가 담겼다.

회의 기간에 북한의 핵 보유 선언 소식이 알려지면서 평화와 지역 안보에 관한 토론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녹색 정치를 표방하는 그룹들 사이에 안보 정책 논의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례 회합 방안이 제안되었으며, 동 티모르·민다나오를 비롯한 지역 분쟁 해결 방안, 쓰나미 피해에 대한 지원 방안도 논의되었다.

이번 회의에서는 아·태 지역 내 미국의 군사 영향력을 놓고 집중 토론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할 것과, 일본 오키나와에 건설하기로 예정된 헤노코 해상 기지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의 레이철 시워트 상원의원은 참가자들에게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한복판에 있는 앨리스 스프링스의 미군 정보 탐지 기지에 대한 감시 활동과, 다윈 미군 기지 건설 반대 활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이번 회의를 계기로 녹색 정치를 지향하는 한국과 일본 지방 의원들의 교류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이미 이번 행사 때 한국에서 지방 의원 5명이 따로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시 환경국을 방문해 오사카부 도요나가시 마을가꾸기 프로젝트를 둘러보았다. 추경숙 도봉구 의원은 “지역 커뮤니티 20개를 꾸려 지역 의제를 발굴하고 계획하는 한편, 실행하고 평가하는 일에 주민이 적극 참여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라고 밝혔다.

“아·태 녹색 정치의 미래 밝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는 세계 인구 절반이 살고 있으며, 세계 빈곤층의 7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벌목으로 숲이 사라지고 강은 오염되거나 댐으로 막히고, 경제 발전과 빈곤 타파라는 명분 아래 무분별한 개발이 진행되면서 온갖 환경 파괴 문제를 안고 있는 아시아. 이 지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녹색당 운동이 뿌리 내릴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회의 참가자들은 미래를 낙관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 보브 브라운 상원 의원은 “아시아가 처한 환경 위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고, 녹색 정치 세력이 정책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면 녹색 정치의 전망은 오히려 밝다”라고 강조했다.

녹색 정치는 범지구적 연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녹색당은 단일 정당으로 국적에 관계없이 세계 차원의 전당대회를 열 수 있는 유일한 당이다. 세계 녹색당은 2001년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첫 회의를 갖고 녹색당 세계 네트워크인 ‘글로벌 그린스(Global Greens)’를 출범시켰다. 이번에 발족한 아·태 녹색정치 네트워크는 글로벌 그린스에 대표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지역과 국가 그리고 세계를 아우르는 녹색 정치를 표방하는 녹색당이 연대를 통해 어떤 상승 효과를 낼 것인가. 빈곤과 환경 문제에 녹색당은 과연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아시아·태평양 녹색 정치 네트워크는 이같은 물음을 짊어지고 각자 활동지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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