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은 멀고 법은 가깝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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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전문 변호사, 조폭 밀어내고 ‘해결사’로 맹활약…주업무는 ‘언론 플레이’
10년 전까지만 해도 연예계에서 해결사 노릇은 조직폭력배 몫이었다. 연예기획사 대표들은 연예인이 말을 듣지 않거나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낌새를 보이면 조직폭력배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두 번 연예계 일을 보아주던 조직폭력배 중에서는 아예 연예계에 둥지를 틀고 군림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나 10년 세월이 지나고, 연예산업이 성장하면서 이제 ‘주먹’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연예계에서 조직폭력배를 대신해 새로운 해결사로 등장한 이들이 있다. 바로 변호사이다. ‘법’이 ‘주먹’을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소송이 벌어지는 연예계에서 변호사들은 공인된 해결사로 활약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영화나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동물에 대한 사건만 전문으로 맡는 변호사가 있고, 컨트리 뮤직 가수의 사건만 맡는 변호사가 따로 있을 정도로 연예산업에 변호사 참여가 일반적이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지만 한국 연예계에도 변호사들의 참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대형 기획사는 대법관 출신인 유력 변호사를 고문 변호사로 두고 있기도 하다.

연예 소송이 잦아지면서 연예 전문 변호사들도 등장했다. 백지영 비디오 사건과 싸이 대마초 사건, 이태란-매니저 분쟁 사건 등 그동안 연예계의 굵직굵직한 스캔들에 관한 소송을 맡아 온 최정환 변호사와 강호성 변호사는 지난해 최초의 연예 전문 법무법인인 두우 사무소를 열었다.

연예 전문 변호사의 세계는 독특하다. 대개는 소송의 승패보다 언론 이용하기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대중 이미지로 먹고 사는 연예인에게 언론 이용하기는 절대적이다. 최정환 변호사는 “언론 이용하기에서 지고 소송에서만 이기면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때문에 연예 전문 변호사에게는 소송에 대한 노하우보다 언론을 다루는 노하우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백지영 비디오 사건을 맡았던 최변호사와 강변호사는 당시 매일 밤 이미지 보호를 위한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이미지 전략의 가장 큰 원칙은 백씨를 호기심의 대상에서 동정의 대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백씨를 섹스 비디오 주인공에서 ‘파렴치한 매니저에게 당한 피해자’로 명예 회복시키기 위해 그들은 기자회견을 적극 활용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사건에 대한 각색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을 준비하며 그들은 메이크업과 코디네이션은 물론 자리 배치에서 백씨의 동선까지 모든 것을 챙겼다. 특별한 메이크업 없이 수수한 차림으로 나타난 백씨는 그 날 기자회견에서 출입구쪽 의자에 앉아 짧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황급히 빠져 나갔다. 가운데 자리에 앉게 할 경우 너무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 자리를 구석에 배치하고 기자들과의 질의 응답이 길어지지 않도록 퇴로를 확보한 것이다.

가수 싸이의 대마초 사건을 처리할 때는 수의 입은 사진을 내보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수의를 입은 사진이 보도될 경우 대중에게 ‘죄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변호사들은 싸이를 자진 출두시켜 평상복을 입은 모습이 보도되도록 유도했다. 자진 출두한 싸이는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고 역시 평상복을 입은 모습이 보도되어, 유죄가 인정된 후에도 싸이는 대중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줄인 채 연예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탤런트 이태란과 매니저의 갈등 사건도 법조인의 조력으로 언론 이용하기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태란과 전 매니저와의 갈등이 섹스 비디오 파문으로 번지자 두 변호사는 신속히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을 통해 이태란이 피해자임을 강조한 뒤 변호사들이 직접 나서서 섹스 비디오가 없다고 공식으로 발표했다. 흑기사로 나선 이들의 도움으로 이태란 비디오 파문은 잦아들었다.

다른 변호사들보다 먼저 연예 소송에 뛰어든 덕에 두우는 선점 효과를 보고 있다. 입소문이 나면서 의뢰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최정환 변호사는 “연예계가 변했다는 사실을 소송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기획사의 횡포로 피해를 본 연예인이 주로 소송을 의뢰했는데 요즘은 인기 연예인의 계약 파기에 대해서 기획사들이 소송을 거는 경우가 더 많다”라고 말했다.

명예 훼손 소송이나 계약 위반 소송 못지않게 연예인들이 자주 제기하는 소송이 바로 세무 소송이다. 연예인들이 세무 소송에 매달리는 이유는 현행 세법이 자신들의 소득에 대해 잘못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행 세법은 연예인을 개인 사업자로 분류해 그들이 올리는 광고 수입 등을 사업 소득으로 간주하고 과세한다. 사업 소득의 경우 들인 비용을 증명하면 과세를 줄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연예인이 연예 활동에 들인 돈을 제대로 비용 처리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세금을 물게 마련이다.

2000년 유명 탤런트 채시라·이승연·전인화·유동근·최수종 씨 등은 국세청으로부터 개인당 10억원 내외의 세금을 추징당한 뒤 이에 불복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졌다. 당시 소송을 맡았던 곽태철 변호사는 “개개인이 사업자나 마찬가지인 연예인에게 저축만큼 중요한 것이 세테크이다. 요즘은 개인 변호사를 통해 세테크를 하는 연예인이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연예계 관련 소송이 새로운 법률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문화의 차이 때문인지 아직도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그 자신이 연예인 출신인 홍승기 변호사는 그 이유를 “아직까지도 안하무인 격으로 사람을 대하는 무례한 기획자가 많다. 그들의 건방진 태도를 견디지 못해 수임을 포기한 적이 많다”라고 설명했다.

연예 전문 변호사 중 유일하게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 회원으로 가입한 오민석 변호사는 연예인을 선별해서 사건을 맡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과 이념적인 지향점이 일치하는 연예인의 사건만을 수임한다는 그는 최근 윤도현 밴드의 고문 변호사 직을 수락했다. 오변호사는 “연예인을 활용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변호사와 소송을 이용해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연예인의 부적절한 만남이 말도 안되는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라고 말했다.

연예 전문 변호사에게는 한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소송으로 먹고 사는 변호사이면서도 의뢰인을 위해 소송을 말려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소송보다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해당 연예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송할 사안도 되도록이면 소송을 당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연예 소송의 정석이라고 한다. 일단 소가 제기된 사건도 최종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연예인이 일으키는 소송은 대부분이 ‘할리우드 액션’인 경우가 많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엔터테인먼트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김형진 변호사는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는 것이 연예 전문 변호사의 올바른 역할이다”라고 말한다. 얼마 전 그는 가수 장나라와 관련한 소속 기획사와 부모 사이의 분쟁을 성공적으로 중재했다. 자칫 법정 소송으로 번질 수 있었지만 장나라의 이미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변호사의 설득에 기획사와 부모가 동의했기 때문에 소송 없이 합의로 마무리지었다는 것이다.
연예 전문 변호사들은 연예계와의 만남이 연예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강호성 변호사는 변호사들의 연예계 참여가 연예산업의 시스템화·투명화를 앞당길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진 변호사는 “잘 지내던 연예기획자와 연예인이 뜨기만 하면 원수가 되는 것은 인간성 문제라기보다는 계약 체제의 문제이다. 연예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진적인 계약 체제가 갖춰져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할리우드에서 연예 전문 변호사들은 엔터테인먼트산업의 중심 축을 형성하고 있다. 소송뿐만 아니라 투자 유치를 비롯한 각종 컨설팅을 도맡는다. 한국의 연예 전문 변호사들도 점점 연예 비즈니스의 중심으로 파고들고 있다. 싸이더스와 씨네마서비스를 자회사로 둔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 지주 회사인 플래너스 엔터테인먼트는 변호사를 대표이사(현 플래너스 엔터테인먼트 고문)로 임명하기도 했다.

지난해 두우의 청담사무소 개소식에는 연예인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두우의 의뢰인이었거나 법률 자문을 한 연예인들이었다. 시일이 흐를수록 연예인들은 법률가와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를 더욱 넓혀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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