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를 가지 않는 이유
  • 이문재 (취재2부장·시인) (moon@sisapress.com)
  • 승인 2003.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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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 지난 주말에는 집앞 강변도로가 자동차로 빼곡했겠습니다. 몇 년째 통 작품을 발표하지 않으니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아직 초보 농투성이에게 농부라는 호칭을 쓰기도 뭣해서 그냥 형이라는 호칭을 씁니다. 양해 바랍니다. 며칠 전 전화를 드렸더니 ‘꽃이나 보러 오지, 뭐가 그리 바빠’라고 했지요?

매화요? 보러 가고 싶지요. 어디 매화뿐인가요, 이형 집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순하게 피어 있을 산수유 그늘 아래에도 잠깐 앉아 있고 싶습니다. 남녘 화신(花信)이 하루 25km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접할 때마다, 서울 생활을 과감히 접고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이른바 ‘땅에 뿌리 박은 삶’을 실천하고 있는 형이 떠올라, 환절기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제 삶이 한층 누추해지곤 합니다.

그해 봄, 형은 매화가 피면 은어떼가 올라온다며 저를 강변 횟집으로 이끌었지요. 수박 향기가 나는 은어회에다 찬 소주 한잔을 털어넣으며 형은 관광 버스에서 내리는 상춘객들을 향해 한마디 했습니다. “아예 여행이 사라지고 말았어. 대신 관광만 설치고 있다구.” 매화를 시작으로 섬진강 일대는 온통 꽃놀이로 시끌벅적해지지요. 올봄에도 광양 매화마을에서 테이프 커팅을 한 꽃놀이는 산수유에서 철쭉제, 쌍계사 십리 벚꽃길로 이어지며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겠지요. 어디 지리산만 그런가요, 방방곡곡, 봄꽃이 모여 피는 곳은 어디나 꽃보다 ‘게걸스러운’ 상춘객이 더 많습니다.

제 단견으로는, 산업 사회 출발과 더불어 여행의 의미가 쇠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산업 사회 이전, 전통적 의미에서 여행은 순례였지요. 순례와 가까운 여행에 참여할 때, 나그네는 길과 분리되지 않았고, 그 길은 여행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여행은 진리를 찾기 위한 고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업 사회가 진전하면서, 여행은 급격하게 관광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행에서 관광으로 이동하는 동안, 여행자의 ‘사유/참여하는 시선’은 관광객의 ‘구경/소비하는 눈길’로 바뀌었습니다.

굳이 꽃놀이까지 거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대량 소비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 생활 자체가 관광화하고 있다는 견해는 이미 낯설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이벤트를 갈망합니다. 이벤트는 물론 시각을 겨냥한 스펙터클 이벤트인데, 문제는 그것이 영화관이나 대형 쇼핑몰, 혹은 대형 사건·사고 뉴스에서만 ‘연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크린이나 쇼윈도, 텔레비전 화면은 말할 것도 없이 컴퓨터 모니터, 휴대폰 액정 화면, 대형 전광판에 이르기까지 대량 소비 사회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자 모니터를 통해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현대인들은 이제 볼거리가 없으면 눈 한번 깜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볼거리를 찾아 헤매면서도 정작 그 볼거리를 자기 문제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탈일상을 외치면서도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형, 올봄엔 기다리지 마십시오. 꽃놀이를 포기하겠습니다. 얼마 전 변산 내소사에 다녀왔는데, 글쎄, 저 역시 영락없는 관광객이었습니다. 단청 하지 않은 대웅전 앞에서 사진 한방씩 찍고 돌아나오는 관광객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연한 자줏빛 물이 오른 왕벚나무 가지 끝에서도 저는 ‘스텍터클’을 찾고 있었습니다. 볼거리가 없으면 이내 심심해지고 마는 저의 이 못된 버릇을 고친 뒤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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