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근히 명맥만 이었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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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등이 아나키즘 1세대…탄압 피하려 엉뚱한 ‘간판’도
한국에서 아나키즘 운동은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회영 신채호 유자명 이정규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일부가 한국인 아나키스트 1세대에 속한다. 이들의 존재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과 의열단 활동 등을 통해 알려졌다. 의열단 리더 김원봉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자명이 그의 참모장을 맡아 이론적 젖줄을 댔기 때문에 ‘아나키스트=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박 열도 테러리스트로만 알려져 있는데, 흑도회를 조직하고 친일파 퇴치 운동을 벌이던 대중운동가이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는 어느 정도 좌파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대개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아나키즘을 선택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시련의 공간이었다. 8·15 직후 이정규 이을규 하기락 등이 ‘자유사회 건설자 연맹’을 결성했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있던 유 림이 귀국해 독립노동당을 만들어 아나키스트 정치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좌우 대립이 심해지면서 이들은 협공을 받고 설 땅을 잃었다. 분단 이후 남쪽에 남은 이들은 대개 교육계로 진출하거나 정치에 뛰어들어 명맥을 유지했다. 이후 정화암 양일동 등이 1970년대 민주통일당을 결성해 재기를 노렸지만 변변한 성과는 없었다.

그나마 자유당 시절 설형회(雪螢會)를 조직해 야학운동을 벌이던 이들이 아나키즘의 명맥을 이었다. 이들은 4·19 직후 교수 데모를 주도했던 1세대 아나키스트 이정규(성균관대 2대 총장)를 중심으로 ‘국민문화연구소’를 결성했다. 아나키즘과 어울리지 않는 명칭을 단 것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 단체는 지금껏 농촌 자치운동과 생활협동운동을 벌이며 아나키즘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는 기관지 <아나키즘 연구>를 내면서 박 열 등 선배 아나키스트들을 기리는 사업을 펴고 있다.

국내의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국민문화연구소가 조직적 인연을 맺고 있지는 않다. 다만 젊은이들이 세미나를 갖거나 자유학교 운동을 벌일 때 도움을 청하면 응하는 정도다. 국민문화연구소 회장인 아나키스트 이문창씨(76)는 “젊은이들이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져 반갑다. 다만 너무 문화적인 면에만 집중하거나 방만한 듯 보이기도 해 아쉬움이 없지 않다. 자기 관리에 더욱 엄격하고, 역사 전통에서도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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