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뭇 생명 죽이는 인간들이여!
  • 충남 보령·이문재 기자 (moosisapress.comkr)
  • 승인 2003.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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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규현 신부·수경 스님 ‘새만금 사업 반대 삼보일배’ 현장 중계
도로에서 한 걸음 벗어나면 농번기였다. 논에 물을 대거나 모판을 다지는 충남 보령 일대 들판은 분주해지고 있었다. 국도에서 반 걸음만 비켜서면 완연한 봄이었다. 자운영 민들레 개나리 진달래… 연초록으로 물드는 야산에는 산벚꽃이 역광을 받아 눈부셨다. 지난 4월15일 오후4시, 새만금 간척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전북 부안 해창 갯벌을 떠난 삼보일배가 보령시 6km 전방, 21번 국도를 통과하고 있었다.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은 낯빛이 새카맸다. 수염도 더부룩했다. 이마에서 목줄기까지 땀이 흥건했다.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는 삼보일배는 30분 이상 지속하지 못한다. 신부님과 스님이 20여 분 삼보일배를 하면, 진행팀이 길가에 미리 자리를 깔아놓는다. 탈진하다시피 한 신부님과 스님이 자리에 누우면 진행팀이 달려들어 어깨와 팔다리를 주무른다. 달아오른 얼굴에는 적신 수건을 덮어준다.

매일 아침 8시 정각에 시작해 오후 5시까지,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한 삼보일배는 멈추지 않는다.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처절한 순례이다.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는 동안 이동하는 거리는 3m 남짓, 하루 평균 5km. 한 시간에 1km를 채 가지 못한다. 신부님과 스님이 하루에 하는 절은 약 1천7백 번. 목적지인 서울 광화문까지 가는 데 60여 일, 총 303km에 달한다. 도합 10만2천여 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날이 19일째. 지난 3월28일, 새만금 갯벌과 온세상의 생명 평화를 염원하는 삼보일배(<시사저널> 제702호 참조)를 시작한 이래,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며 100km를 왔다. 전체 일정의 3분의 1을 소화해낸 것이다. 부안에서 죽산을 거쳐 김제, 대야를 지나 전북과 충남 도계인 금강 하구둑을 건너던 날이 4월8일. 이후 서천, 웅천 땅에 이마를 대며 4월12일 보령시로 들어섰다(삼보일배 현장 일지와 사진, 동영상 등은 환경운동연합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그동안 신부님과 스님은 운동화 세 켤레를 새로 사 신어야 했고, 면장갑은 하루에 두 켤레씩 구멍이 났다.

이 날 야영지는 남포면사무소 앞. 진행팀이 먼저 도착해 천막 세 동을 쳤고, 3일째 순례단 20여 명의 끼니를 대고 있는 내소사에서 저녁이 와 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자, 수경 스님은 천막 안에서 오랜만에 삭발을 했다. 기자는 상체를 숙이고 있는 스님 곁으로 다가가 관절 상태부터 물었다(스님은 관절이 좋지 않다. 기자는 2001년 5월 스님을 따라 ‘지리산 850리 도보 순례’를 완주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스님은 무릎에 탈이 났었다). 스님은 “5∼6일째 되던 날은 관절이 부어 무릎을 굽히지도 펴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괜찮아졌다. 마음도 평화롭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새만금 사업이나 이라크 전쟁이 모두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어리석음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더 편해지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삼보일배만 해도 그렇다. 사람들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행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동차만 타고 다니니까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다소 불편해지더라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삼보일배는 이번이 네 번째다. 2001년 5월 새만금 간척 사업에 반대하며 명동성당에서 청와대까지 삼보일배를 시작한 이후 지난해에는 람사회의가 열리던 스페인까지 날아가 함께 삼보일배를 했다. 천막 앞에서 문신부는 “스님과 나는 자주 만나면 안돼. 그때마다 이렇게 일을 벌이잖아”라며 웃었다. 스님에게 신부님은 ‘양심적인 종교인’이고, 신부님에게 스님은 ‘가장 든든한 벗이자 형제’이다.

동쪽 하늘에 둥근 달이 떠올랐다. 음력 열나흗날 밤. 야영지 앞에는 마침 배꽃이 피어 있었다. 문규현 신부는 “인터뷰는 하지 않기로 했는데”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가 말문을 열었다. 신부님은 “이 길이 하늘의 뜻이라면 이루어질 것이다. 온세상 생명 가운데 우리의 형제 자매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한다. 총성만 없지 새만금 방조제도 인간의 욕심이 생명을 약탈하는 현장이다”라고 말했다.

삼보일배는 참회하는 길이고 고백하는 길이며 기도하는 길이다. 비장한 고행이고 간절한 수행이다. 수경 스님은 “누구 한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새만금 사업 반대라는 거대한 사안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고 모두 각성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신부는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관념이며 허구이다”라고 말했다.

신부님과 스님이 ‘세상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보령 시내를 지날 때, 삼보일배를 지켜보던 일부 시민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생수며 과일을 들고 나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출근 시간을 늦추며 뒤따르는 공무원도 있었다. 지나가는 자동차에서는 손을 흔들거나 경적을 울리며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삼보일배는 앞으로 홍성 예산 천안 평택 수원 안양을 거쳐 5월22일께 서울로 접어든다.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삼보일배는 가혹해진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자동차 매연이 극심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새만금 간척 사업이 중단되지 않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뭇 생명의 위기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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