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한평생이건만 황혼이 서글프네
  • 김문성 (국악 해설가) ()
  • 승인 2003.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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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명창 타계로 본 국악 명인들의 삶과 죽음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이 한마디로 단번에 ‘국민 소리꾼’ 반열에 오른 판소리 명창 박동진옹이 지난 7월8일 고향인 공주에서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친근함의 표시를 ‘쎄레죽일 놈’ ‘씨레비 자식’으로 호칭하는 등 거침없는 육담과 농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으며 독보적인 지위에 올랐던 박명창은 자신을 광대로 불러주기를 원하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정정열 유성준 조학진 김창진을 사사한 그는 임방울·박록주처럼 좋은 성음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지만 인당(忍堂)이라는 아호가 말해주듯 피나는 노력 끝에 그만의 독특한 성음을 성취해 대명창 반열에 올라섰다.

박명창이 타계한 다음날인 7월9일 새벽 멀리 부산에서 또 하나의 부음이 들려왔다. 가야금 연주자로 명성을 떨친 강문득 선생이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는 판소리 명창 강장원과 임유앵 사이에서 태어나 국립국악원 국악사양성소를 졸업한 전형적인 국악 엘리트였지만, 가난한 탓에 제대로 먹지 못해 젊은 나이에 영양 실조에 걸렸고 그로 인해 류머티스성 질환에 시달렸다.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가야금을 연주하는 그에게 불편한 자세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벽에 의지해 반쯤 누운 자세에서 배에 가야금을 올려놓은 다음 농현했음에도 불구하고 황병기는 그의 그런 자세에서 나오는 소리를 ‘산조 연주로서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신기의 소리’라고 평했다.

박동진 명창이 타계하자 KBS·MBC 등 공중파 방송은 정규 프로그램을 박명창과 관련된 프로그램으로 긴급 대체했으며, 그의 빈소는 대통령과 문화관광부장관을 비롯한 각 기관에서 보내온 수많은 조화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국악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서는 문상객 수백명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으며 국악방송은 이를 생중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문득의 빈소는 김소희가 부른 <육자배기>와 고인이 생전에 연주한 가야금 산조 가락이 간간이 흘러나올 뿐 여느 평범한 망자의 빈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은 가족과 친척, 제자와 가까운 지인 들이 참석해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이처럼 평생을 우리 전통 음악을 위해 헌신하고도 대가라고 치기에 너무나 알량한 대접을 받는 현실은 비단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다. 그나마 박귀희 김소희 안비취 박동진 같은 명창은 죽음을 계기로 업적이 매스컴을 통해 재조명되는 행운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이른바 ‘인간 문화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문화재 못지 않게 활약하고도 불우한 말년, 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명인들이 늘 존재했다.

대표적인 이가 김옥심이다. 경기민요 소리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실력자로 평가되는 김옥심의 말년은 무척 불우했다. 1988년 1월 타계한 그녀의 죽음이 국악계에 알려진 때는 3개월이 지난 뒤였다. 1950∼1960년대 국악계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하며 제1회 중앙방송국 전국국악대상 1등상, 제1회 세종국악대상 1등상을 거머쥘 정도로 독보적인 실력가가 세인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결정적인 사건은 인간 문화재 심사에서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간 문화재에서 탈락한 것은 곧 국악계에서 ‘비주류’로 낙인 찍힘을 의미했다. 많은 국악인들이 인간 문화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예술 세계가 보호된다는 문화재의 타이틀이 갖는 상징도 상징이려니와 ‘비주류’로 남는 데 대한 두려움도 크게 작용했다.

이처럼 ‘주류’에 합류하지 못하고 뒤안길로 사라져간 명인은 셀 수 없이 많다. 정가의 이난향·지금정(지화자)·최정희, 경기소리의 이진홍·이소향·김옥심, 서도소리의 이정열·이반도화·최난엽·김춘홍, 대금의 한범수, 판소리 조농옥·김정애, 제주민요 김주옥 등 일일이 꼽기에 끝이 없다.

비주류 국악인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이 그동안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2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는 ‘재야’ 인간 문화재들에게 공로상을 수여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다. 하지만 당시 기득권의 힘이 워낙 막강해 이러한 움직임은 1회성 행사로 끝나고 말았고,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는 누리는 삶의 질, 혜택의 수준에서 격차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 문화재 제도로 인해 국악계에는 끊임없이 알력과 암투가 벌어졌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와 그로 인한 희생자가 늘 존재해 왔다. 인간 문화재 제도의 취지는 매우 좋은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혜택을 받는 소수에게만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것이었을 뿐 그 밖의 많은 국악인들에게는 그만큼 고통과 시련이기도 했다.
물론 인간 문화재라고 해서 그들의 생활이 풍족하고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전북지역에서 꽃피운 동초제 판소리의 비조인 김연수의 말년은 인간 문화재 타이틀과는 무관하게 매우 비참했다. 그보다 몇 년 앞서 사망했던 서도소리 명창 장학선은 동생 집을 전전하다 생을 마감했다. 한때 <춤추는 가얏고>라는 드라마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져 세인의 눈길을 모았던 함동정월 역시 서울 이문동의 초라한 단칸방에서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근자에 타계한 판소리 명창 한농선, <은율 탈춤>의 피리잽이 김영택 역시 인간 문화재라는 타이틀과는 무관하게 힘들게 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당히 많은 명인들이 병마에 시달리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 판소리 대명창 한승호와, 제주민요 명창 김주산 그리고 서도소리 명창 지관팔이 그렇다. 인간 문화재이건 아니건 이들은 오로지 오롯한 우리 소리를 전승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들이다. 이제부터라도 인간 문화재에게 집중되었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우리 소리를 위해 일평생을 매진한 사람들이 모두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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