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극단의 토털 아트무용<블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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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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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반데키부스 안무 <블러쉬>/사랑의 아름다움에 가린 인간 본성 그려
우리가 아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신화는 아름답고 슬프기만 한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뱀에 물려 세상을 떠나자 오르페우스는 지하 세계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여 신들을 감동시킨 뒤 아내를 다시 데리고 나오지만 결국 신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영원히 아내를 잃어버린다. 이런 통속적인 러브 스토리가 신화의 전부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신화를 모티브로 창작되었다는 <블러쉬>(울티마 베스 무용단 9월 26∼28일, LG아트센터)는 그 어디에서도 애잔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다. 폐쇄적이고 우울한 록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전기톱을 든 여자가 섬뜩하게 서 있고, 무용수들은 행여 어디가 부러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만큼 고난도 곡예를 보여준다. 무대 위로 쥐를 들고 나오는가 하면, 믹서로 갈아 만든 정체불명의 음료수를 서로에게 들이대고, 그것도 모자라 관객에게 동물 사료를 뿌려댄다.

무용수들의 엽기적인 행태 중에서도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무아지경 속에 한시도 멈추지 않는 격렬한 움직임이다. 마치 ‘극단’이 무엇인지 실제로 보여줄 것처럼 공연 내내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하며 춤을 춘다. 그렇다고 의미 있는 움직임은 결코 아니다. 단지 서로 뒤엉키고는 풀어졌다가, 서로를 밀어붙이고, 무대 뒤 갈라진 스크린 사이로 다이빙할 뿐이다.

<블러쉬>는 벨기에 현대무용계의 총아 빔 반데키부스의 2002년 초연작이다. 놀랍게도, 그나마 그의 안무 가운데 가장 덜 파괴적이고 덜 위태로운 작품이라고 한다. 반데키부스의 안무는 너무도 위험하여, 무용수 대부분이 부상을 경험한 바 있다. 벨기에 현대무용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무용수 김남진은 “빔 반데키부스의 컴퍼니에 들어가려면 몸이 망가지는 것은 각오해야 한다. 인대가 늘어나고 근육이 파열되고 무릎이 나가는 것은 다반사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에 직접 출연하는 반데키부스조차 그간 몇 차례 부상으로 인해 한쪽 무릎은 인대와 연골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부상이 전부가 아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칼로 자신의 몸을 베는 장면도 있다. 놀란 관객들의 야유와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는 더욱 깊숙이 칼집을 낸다.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내로라 하는 젊은 무용수들은 빔 반데키부스의 오디션에 모여들고 있다. <블러쉬>에 출연하는 무용수 7명은 7백명이 참여한 오디션에서 뽑힌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팔에 멍이 들건, 인대가 끊기건, 뼈가 부서지건 크게 개의치 않는다. 단지 자신이 느끼고 추구하는 바를 솔직하게 무대 위에서 표현했다는 것만으로 충만함을 느낄 뿐이다.

현대 무용의 메카 벨기에에서 앙팡 테리블로 승승장구하는 빔 반데키부스는 본래 사진작가 겸 영화연출가였다. 이전에 무용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던 그에게 ‘안무가’라는 직함이 붙은 것은 실로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 1987년 그가 실험적인 무대로 시도했던 ‘연극’ 두 편이 ‘무용 혁명’이라는 극찬과 더불어 뉴욕 베시 어워드에서 무용·음악·퍼포먼스 상을 수상한 것이다.

반데키부스의 작품에서 보이는 자유롭고 격렬한 움직임, 동물의 형상을 띤 제스처, 언제나 꼭 빠지지 않고 곁들여지는 영상과 연극적인 대사는 이런 성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각종 장르를 넘나드는 탈장르적인 시도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그 자체가 고유한 스타일로 굳어졌다. 실제로 그의 무용은 ‘테아트르 당세’(춤으로 말하는 연극)로 구분되어, 텍스트·무용·음악·영상이 완벽하게 결합된 ‘토털 아트의 결정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초연될 때마다 찬사와 야유를 동반하는 반데키부스의 안무가 결국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때문이다. “나의 춤은 충격의 미학이 아닌 솔직함의 미학이다”라고 주장하는 그는, 위선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소극적으로 마인드 컨트롤 되어버린 현대 사회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시 ‘오르페오’ 신화로 돌아가자면, 반데키부스는 그 아름다운 통속성으로 인해 간과된 몇 가지 인간의 본성을 포착해냈다. ‘블러쉬(blush)’는 빨개진 얼굴, 즉 홍조를 의미한다. 반데키부스는 “진정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때 사람들은 얼굴이 붉어진다”라고 말한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결국 행하는 인간의 심리,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든 곁에 두고자 하는 인간의 집착 등 사랑의 아름다움에 가린 인간의 진정성과 단편적인 충동성을 그의 작품 <블러쉬>에서 우리는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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