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는 일제의 유물
  • 김상용 (부산대 법대 교수) ()
  • 승인 2003.09.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7세기 이전까지 처가살이혼 일반화…‘남자에 의한 가계 승계=전통 가족’ 근거 없어
지난 9월25일 법무부가 민법 개정과 관련해 마련한 공청회는 청중의 소란 때문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호주제존치론자들로부터 집중 타격의 대상이 되었던 김삼용 교수(부산대 법대)가 당시 상황을 전해왔다.

그 날 공청회 자리에서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인사말을 시작하자마자 대뜸 호주제존치론자들 속에서 “××년, 지랄하네”라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호주제존치론자들(그 날 참석했던 존치론자들 중 대부분은 이른바 ‘정통 가족 수호 범국민 연합’(정가련) 소속이었다) 중 이런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법무부장관이 남자였어도 과연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남존여비 의식이 그들의 뼛속 깊이 스며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공청회가 순조롭게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조짐은 그때부터 나타났었다. 필자는 첫 번째 발표자로서 자녀의 성(姓)에 관한 개정안 내용에 대해서 발표를 시작했다. 그러나 채 5분도 못되어 욕설과 고함이 존치론자측 방청석에서 터져 나왔다. 우리 민족의 성씨 제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면서,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인구의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무성층(無姓層;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이후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새롭게 성을 취득했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존치론자들은 조선 전기에 성을 갖지 못했던 노비 등 천민층의 비율이 40∼50%에 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듣고는 이성을 잃었다. 그들은 나에 대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을 뿐만 아니라, “니 애비 김××가 노비냐? 이 ××야”라고 하는 등 아버지에 대해서까지 모욕을 가했다(나의 아버지는 1960년 민법 시행 당시부터 호주제 폐지를 주장한 김주수 교수이다).

호주제존치론자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날의 행동은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존치론자 중 두 사람은 나를 해치겠다는 목적으로 단상을 향해 돌진했는데, 이를 제지하던 법무부 검사의 눈을 머리로 들이받아 다치게 하기까지 했다. 정가련 대표로서 반대 토론자로 나온 변호사 구상진씨는 나에게 “멱살을 잡아 내치고 싶지만 참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그는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자들이 도대체 사람이냐”라고 고함을 질러서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들이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이론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우니까 불필요하게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주제존치론자들은 말끝마다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그 날 문제가 되었던 조선 전기의 무성층 문제만 해도 그렇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성이 없는 사람이 약 절반 정도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학자들이 호적 대장 등 당시의 자료를 분석해 정리해 놓은 내용이다. 예를 들어 <어부사시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고산 윤선도의 아버지(尹唯幾·1544-1619) 남매들이 그 부친의 재산을 나누어 가진 기록을 보면, 전체 노비 수가 3백84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큰 양반들이 그 정도로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하나의 예이다.

존치론자들은 ‘정통 가족’을 수호하겠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들이 말하는 정통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가련’ 공동대표인 구상진씨는 “호주제, 즉 가계승계제도는 우리 가족 문화의 핵심이고 이로 인한 남녀 구분에는 정당한 사유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장남에 의한 가계 승계가 우리 민족의 정통(혹은 전통) 가족 제도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역사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원래부터 남자에 의한 가계 승계 제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려 시대 이전은 물론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17세기 이전까지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혼인 형태였다. 대성리학자인 퇴계 이 황 가문의 아들 손자뿐만 아니라 종손까지도 처가에 거주했고, 율곡 이이 또한 부친이 처가살이를 했으므로 외가에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혼인한 딸이 부모를 모시고 살았고, 제사도 딸과 아들이 돌아가면서 지냈다. 그러니 딸이면 충분했고, 아들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부모의 재산이 딸과 아들에게 똑같이 상속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아들 딸 모두 없는 경우에도 양자를 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17세기 이전에는 명문가의 경우에도 자식이 없어서 세대가 단절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전통적 가족 제도는 17세기를 기점으로 변질되었다. 조선이 중국에서 수입한 종법제가 전국에 확산되면서 철저히 남성 중심의 가치관과 질서가 뿌리 내리게 된 것이다. 종법이란 아버지와 장남을 중심으로 가계를 계승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며, 가부장적 가족 질서는 이것이 구체화한 것이다. 조선 왕조는 가부장적 가족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처가살이혼을 금지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시집살이혼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민족에 뿌리 내린 고유한 혼인 제도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까지도 처가살이혼은 계속되었으며, 시집살이혼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널리 행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곧 부계 혈통 강화와 여성 지위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살펴본 대로 남자에 의한 가계 승계는 조선이 중국에서 종법제를 수입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 민족사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 역사는 기껏해야 3백년을 넘지 않는다. 반면에 고려 시대 이전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은 고유한 가족 제도를 지키고 보존해 왔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어 온 전통 가족 제도에서는 아들에 의한 가계 승계라는 관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며, 딸이 부모를 봉양하고, 딸과 아들이 돌아가며 제사를 모셨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장남이 제사를 독점하게 되고, 제사 승계를 통한 가계 승계가 이루어졌지만, 이 시기에도 호주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호주 승계를 통한 가계 승계는 원래 일본 무사계급에 존재했던 것이며, 이것이 일제 시대에 강제로 이식된 것이다. 정가련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더 이상 호주제가 우리의 ‘정통 가족’이라고 우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역사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행동이 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