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되어 만난 베트콩과 따이한
  • 정리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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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해방 전사’ 반레 시인, ‘파월 장병’ 김준태 시인을 만나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민족시인 반레(55)가 한국을 찾았다. 소설가이며 영화감독이기도 한 그는 1966년 고등학생 때 자원 입대한 후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군과 싸운 ‘베트남 해방전사’ 출신이다. 시집 <사랑에 빠지다> <불 아래 들판>과 장편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등 작품집 20여 권이 있다. 영화도 20여 편을 만들었고, 다큐멘터리 영화 <영혼의 유언장>으로 2000년 베트남 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여러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항상 ‘시인’으로 불리기를 희망한다. 본명은 ‘레지투이’. 반레라는 필명은 시인이 되고 싶어했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친구의 이름이다. 소설가 방현석씨는 최근 반레 시인과의 만남을 형상화한 소설 <존재의 형식>으로 황순원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반레 시인과 대담한 김준태씨(55)는 고등학교 교사와 신문사 기자를 거쳐 현재 조선대 초빙교수로 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직후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라는 시를 발표해 널리 알려졌으며, <참깨를 털면서> <국밥과 희망> 등 시집 열두 권을 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회원이다.

김준태 시인은 1969년부터 1년간 해병대 청룡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그래서 이 대담은 베트남 시인과 한국 시인의 만남이면서, 베트콩과 ‘따이한’으로 전장에서 마주섰던 동갑의 두 젊은이가 초로에 접어든 뒤에야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눈 자리이기도 했다. 대담은 10월3일 오후 <시사저널> 회의실에서 있었다. 통역은 하노이 대학 동방학부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고 있는 하밍타잉 씨(여·26)가 맡았다.김준태:한국에 처음 오셨죠? 서울의 가을 날씨가 어떻습니까?
반레:서울이나 하노이나 가을 하늘은 비슷하게 쌀쌀합니다. 서울에 와보니 옷을 예쁘게 입은 아가씨들이 많이 보여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입술이 너무 붉어 모두 포도를 먹은 줄 알았어요(웃음).

김:저는 35년 전에 약 1년 동안 베트남에서 군인으로 참전했습니다. 다낭에서 가까운 호이안의 고노이 섬에 있었습니다. 최전선이었죠. 제가 있던 부대는 청룡부대라는 해병대였는데,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불리던 부대였지요. 그리고 35년 만인 2001년에 다시 베트남을 방문했습니다. 가서 바우닌 시인을 만났죠. 그도 반레 선생과 같은 해방전사 출신이었죠. 이야기를 나눠보니 바우닌 시인과는 전쟁 때 강 하나를 놓고 1km 정도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었더군요. 그 이야기를 나누며 그에게서 고향 친구 같은 친근함을 느꼈습니다. 베트콩과 ‘따이한’(베트남 전쟁 때 한국 군인을 부르던 말) 사이였는데도 그랬지요.

반레:이제 베트콩이니 따이한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같은 인간 아닙니까. 그리고 한국 해병대 이야기는 당시에 많이 들었습니다.

김:전쟁 이야기를 하자니 벌써 머리가 아프군요. 당시 베트남 참전은 대부분 지원에 의한 것이었지만 해병대는 차출이었지요. 저는 제 뜻과 상관없이 베트남에 갔지만, 반레 선생께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2년 전 김대중 대통령도 정식으로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가서 상처를 남긴 것에 대해 ‘유감스러운 발자취를 남겼다’고 말씀했습니다. 베트남 정부와 인민들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말이었다고 봅니다. 반레 선생은 한국에 대해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있을 텐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반레: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주신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국과 베트남은 12세기부터 교류했습니다. 한국의 옛 시인들이 쓴 시도 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인상적이었죠. 그런데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한국군이 미군을 돕기 위해 베트남에 왔다고 신문에 났더군요.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얼마 안가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입대했습니다.

김:그때가 열일곱 살 때였죠?

반레:네, 두 달 후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태까지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습니다.

김:그렇지만 반레 선생은 시 대학을 나오셨고, 소설 대학을 나오셨고, 영화 대학까지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선생의 체험을 듣고 싶군요. 군 생활은 주로 어디에서 하셨습니까?

반레:하노이 근처에 있는 화빙에서 6개월 정도 훈련받은 뒤, 대부분은 남부 베트남의 빙롱-떠이닝 지역에서 있었습니다.
김:월맹 정규군이 아니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다시 말해 ‘베트콩’으로 활동했군요.

반레:프랑스와 싸운 군대를 베트남독립동맹(월맹, 베트민)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베트민 소속이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사이공으로 가서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을 만들었습니다. 여기 속해 싸운 전사들을 베트콩(Viet Nam Cong San을 줄인 말)이라고 합니다. 베트남공산주의자라는 뜻이지요.

김:상당히 오랫동안 전쟁터에 계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같이 입대했던 동기 가운데 5명만이 살아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반레:처음 3백 명이 모여 입대했어요. 그런데 해방 후에 보니 5명만이 살아 남았더군요. 3년 전에 한 친구를 만나 회포를 푼 적이 있습니다.

김:동료들은 대부분 전사했나요?

반레:싸우다 죽은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폭격을 당하거나 부비트랩을 밟아 죽은 경우가 많았지요. 굶어 죽은 사람도 많았죠. 또 많은 수는 병에 걸려 사망했죠.

김:제2차 세계대전 때 투하된 폭탄 양보다 4배나 더 많은 폭탄이 당시 베트남에 쏟아졌다고 들었습니다. 마이클 매클리어라는 미국 종군작가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을 보니 호치민 주석이 했다는 말이 실려 있더군요. ‘그래 폭격을 해라. 그러면 웅덩이가 패여 연못이 생길 것이다. 우리는 그 연못에서 자란 메기를 잡아먹고, 베트남의 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이다.’ 흔히 베트남 통일을 20세기의 신화라고 합니다. 미국을 이긴 나라는 베트남밖에 없었으니까요. 반레 선생은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가장 큰 힘이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반레:베트남은 옛날부터 중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 여러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물리쳤지요. 아마 외세의 침략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는 민족성, 다시 말해 민족 자존심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베트남 사람들은 화해를 잘 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국과 계속 적대하면서 어떻게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쟁이 끝난 다음 곧 화해하고는 했지요.

김:베트남에 가보니 지금까지도 호치민에 대한 추모 열기가 대단하더군요.

반레:모든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존경하고 신비로운 인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군대에 있을 때 호치민이 사망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들었던, 호치민 주석이 돌아가시던 날 밤의 이야기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지금껏 잊히지 않습니다. 호주석은 숙소에서 홀로 지냈는데, 그 날 밤 경비가 보니 호주석이 주무시는데도 라디오가 켜져 있더랍니다. 그래서 들어가 라디오를 껐더니 호주석이 눈을 뜨고 이렇게 말하더래요. ‘그냥 켜놓게. 그래야 외롭지가 않아.’ 호주석은 평생을 국가를 위해 헌신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독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울었습니다.

김:반레 선생은 시·소설·영화 등 여러 예술 장르를 드나들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분야는 어떤 겁니까?

반레:저는 원래 시인입니다. 그리고 시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소설로 썼습니다.

김:반레 선생이 쓴 <꼬마 수인들이 다투는 소리를 듣다>라는 시를 보았습니다. 직접 낭송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반레:베트남 시인들은 시 낭송을 좋아합니다. 제가 한 번 외워 보겠습니다. ‘적들이 감옥 문을 잠시 연 날/두 살배기 다섯 살배기 수인들이 햇빛 속으로 엉금엉금 나왔다/담장 밖 풀을 뜯는 물소 한 마리/아이들이 서로 다툰다/저건 코끼리야/담장에 기대앉은 여자 수인들, 저마다 웃음이 터지는데/볼에는 눈물이 가득 흐르네’(구수정 번역)

김:감옥에서 태어나 엄마와 함께 지내는 아이들이라서 베트남에서 흔한 물소도 구별할 줄 몰랐군요. 이 시는 1973년에 쓴 시로, 미국과 베트콩의 평화협정이 진행되면서 정치범들이 잠시 사동 밖으로 나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상황을 그린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반레 선생의 가계를 보니 할아버지 때부터 학문과 예술에 밝았던 것 같습니다.

반레:아닙니다. 할아버지는 한문을 많이 아셨지만 시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베트남 전통극을 하는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무대에서 여자로 분장하고 노래하는 역을 했죠.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프랑스와 벌인 독립 전쟁에 참전했고, 공산당원이었습니다. 조그만 현의 공산당 지도자를 지냈습니다.

김:결혼은 어떻게 했습니까?

반레:좀 복잡합니다. 젊었을 때 어머니의 주선으로 고향 마을 아가씨와 결혼했으나 성격이 맞지 않아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통일 이후 사이공에서 대학에 다니던 여학생을 만나 재혼했습니다.

김:저는 시인이지만, 소설을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시로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소설을 썼죠.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베트남 전쟁 때 참전했던 지휘관이었습니다. 저는 베트남 전쟁 때 병사로 참전했다가 1980년에는 그들과 맞서 싸우는 처지로 바뀌었지요.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썼습니다. 반레 선생은 시인이면서 소설가입니다. 반레 선생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이 국내에서 번역 소개되어 있는데요, 소설에서는 어떤 내용을 말하고 싶었습니까?

반레:문학은 사람들의 삶을 좋은 쪽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전쟁의 모든 참상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제 글을 읽은 뒤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김:소설에 보면 귀신이 나오는데, 이런 형식이 베트남 소설의 전통적인 양식인가요?

반레:아닙니다. 제 나름으로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바를 귀신을 통해서 묘사하고 싶었을 따름이죠. 베트남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주위에 있다고 믿습니다. 자기 행동을 영혼들이 본다고 여기며 조심하는 거죠.
김:영화 감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반레:사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시에 아주 가깝습니다. 진실을 바로 보여줄 수 있어서 매력이 있어요. 그래서 군에서 제대한 후 바로 국립해방영화사에 들어갔습니다.

김:베트남에 요즘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의 대중 문화가 많이 소개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았습니까?

반레:베트남 사람들도 한국인처럼 휴먼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누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한국의 가족이나 사회, 기업 문화도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는 대개 삼각 관계를 다루거나 주인공이 암에 걸려 죽는 등 비슷한 소재를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김:지금 한국은 이라크 파병 문제로 전국이 시끄럽습니다. 1960∼1970년대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미국의 참전 요구를 수용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국론이 나뉘어 있습니다. 한국의 이라크 파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레:제가 평화를 원하듯이 여러 분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했지만 결국 물러갔습니다. 저는 어떤 나라에서도 외세가 들어가 오래 버틸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라크 문제는 이라크인 스스로 해결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건 제 생각이고, 솔직히 한국의 파병 문제는 한국의 문제여서 제가 나서서 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봅니다.

김:주체성을 가지고 우리 문제를 풀어가라는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베트남 작가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반레:모든 잘못은 항상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베트남에 한국의 대중 문화는 많이 소개되어 있지만, 문학을 비롯한 고급 문화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베트남과 한국의 문학 작품들이 서로 많이 번역되어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을 통해 서로 이해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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