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최고 미술’ 100년 만에 빛 보다
  • 토론토·성우제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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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왕립박물관, 김준근 작품 28점 발견·공개
캐나다를 대표하는 박물관인 토론토 온타리오 왕립 박물관(ROM)에서 조선 후기 풍속화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작가는 구한말에 활동한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이다. 지난 10월 초 온타리오 왕립 박물관은 토론토 한국예술진흥협회(CARACA) 한재동 회장(웨스턴온타리오 대학 교수)과 더불어 이 박물관이 소장해온 기산의 작품 28점을 공개했다. 박물관측은 몇년 전 한 미술 애호가가 이 그림첩을 기증했으며, 최근 한국 관련 미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기산의 작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기산은 조선 말기 서울을 비롯해 부산·원산·제물포 같은 개항장에서 외국인 선교사·외교관·상인 들에게 그림을 그려주었던 풍속화가이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특별한 팬’을 가졌던 덕분에 조선 시대 화가 중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현재 온타리오 왕립 박물관이 보유한 기산의 작품은,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조선 땅을 밟은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1863~ 1937)의 의뢰를 받아 기산이 직접 그린 것으로 확인되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1888년부터 일제 강점기인 1927년까지 조선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전념했던 게일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서양 문학 작품 <천로역정>(1895년)을 번역한 선교사로 유명하다. 바로 이 책에 삽화를 그린 화가가 기산이다. 게일은 <천로역정>을 원산에서 번역했는데, 이번에 확인된 기산의 작품에도 ‘元山’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이 그림들은 <천로역정>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산의 작품은 예술성보다는 조선 말기의 생활상을 충실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서양인들에게 크게 주목되었다. 말하자면 기산은 10여 년간 활동하면서 일상 생활·노동·놀이·제례 등 구한말 풍경을 요즘의 기념 엽서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조선이라는 나라를 서방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유영식 교수(토론토 대학·한국학)는 “당시 서양인들이 쓴 조선 관련 책을 보면 기산과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이 많이 나온다”라고 밝혔다.

기산은 조선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서양에서 전시회를 연 기록도 가지고 있다. 1895년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민속박물관에서 조선 화가의 첫 해외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기산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 또한 한국보다 해외에 더 널리 퍼져 있다. 한국에는 숭실대학에 100점 정도가 있을 뿐이다. 기산의 작품을 보유한 외국 박물관 및 연구서만 보아도 그가 해외에서 얼마나 중요한 작가로 대접받는지 알 수 있다.

기산의 작품이 서양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작품을 소장한 유명 박물관뿐만 아니라 기산에 관한 수많은 연구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프랑스 인류학자 샤를 바라가 1892년에 쓴 <세계 일주 여행지>, 1984년에 출간된 영국 군인 캐번디시의 <한국과 백두산>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쏟아져 나온 한국 소개서에는 거의 예외 없이 기산의 그림이 실려 있다.

그뿐 아니다. 유명한 동양미술 사학자인 안드레아스 에카르트가 1929년에 발표한 <한국 미술사>에서도 기산의 작품은 도판과 더불어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1958년에는 기산의 작품집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F. 융커가 펴낸 <기산, 옛 한국 그림들>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기산의 작품을 소장한 외국 박물관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독일 함부르크 민속박물관·뮌헨 민속박물관·동베를린 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영국도서관,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 덴마크 국립박물관, 네덜란드 라이덴 국립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민속박물관이다. 여기에 캐나다 온타리오 왕립 박물관이 기산 작품을 보유한 박물관으로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온타리오 왕립 박물관 소장품은 양은 많은 편이 아니지만 질은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작품의 크기부터 다르다. 개항장에서 외국인 손님을 상대로 여행 기념품처럼 제작했던 까닭에 기산의 작품은 거의 모두가 A4 용지보다 조금 작은 가로 13cm, 세로 17cm 정도의 소품이다. 그러나 온타리오 왕립 박물관 소장품은 가로 70cm, 세로 120cm로, 지금까지 확인된 기산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크다. 작품 보존 상태도 양호해 제작 당시의 화려한 색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기산의 작품들은 질이 천차만별이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작품도 있지만, 여행 기념품으로 그림을 남발하는 바람에 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온타리오 왕립 박물관이 소장한 작품은 정성을 들인 흔적이 뚜렷하다. 당대의 풍경을 정직하게 묘사하면서도 색상과 구도가 뛰어나고 품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실린 내용 또한 독특하다. 돼지를 팔러 장에 가는 여인, 밭을 가는 농부, 놀이하는 어린아이, 벌을 쓰는 죄수, 양반가의 제사 등 서민과 양반층의 생활 풍경을 담은 것은 다른 나라에 소장된 작품과 그 내용이 유사하다.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성경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구한말 한반도 지도를 옮겨놓은 그림도 있다. 이는 선교사 게일이 교육을 염두에 두고 의뢰한 것으로 추정된다.

온타리오 왕립 박물관에서 한국관을 관장하는 동아시아 담당 큐레이터 클라스 루덴비크 박사는 “우리가 소장한 기산의 작품은 1900년대 초반 선교사 게일이 캐나다에서 한국에 관해 강연할 때 들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게일은 기산의 작품을 캐나다에서 팔아 기금을 마련하려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물관측은 기산의 작품을 연구하고 분류한 다음 2005년 12월 재개관되는 ‘한국미술 갤러리(Gallery of Korean Art)’에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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