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밖으로 걸어나온 16세기 양반가 여인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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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공개 시작한 파평 윤씨 모자 미라의 비밀
지난해 9월 경기도 파주 교하읍 파평 윤씨 종중산 묘역에서 발굴되어 화제를 모았던 파평 윤씨 모자 미라가 고려대박물관(관장 최광식)에서 11월7일부터 22일까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복식 66점을 비롯해, 한글 편지·신발·참빗 등 유물 80여 점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최광식 박물관장은 “하나의 묘지에서 나왔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물이 많이 출토됐다”라며, 이번 전시가 국내 미라 연구의 전범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평 윤씨 모자 미라 발굴과 연구 과정을 재구성했다.

2002년 9월6일. 고려대 박물관 김우림 학예과장(41)은 연구팀과 함께 경기도 파주로 향했다. 파평 윤씨 정정공파 교하종중에서 따로 안장되어 있는 윤돈인(1509~1584년) 부부의 묘를 합장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는 옛 무덤을 발굴하는 날이면 조언도 하고, 유물도 수습할 겸 참석하고는 했었다.

오후 1시30분, 윤돈인의 묘에서 위로 10m쯤 떨어진 곳에서 회곽(灰槨) 하나가 발견되었다. 봉분은 사라진 뒤였고, 주인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없었다. 윤씨 종중은 잃어버린 조상 묘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굴착기를 동원해 회곽을 깨고 외관의 천판을 걷어내자 ‘파평윤씨지구(坡平尹氏之柩)’라고 쓰인 명정이 보였다. 윤씨 집안 여자의 묘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라가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관 뚜껑을 열자마자 전혀 썩지 않은 완벽한 형태와 색상의 염습의가 드러났다.

“이건 틀림없이 미라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김과장은 말했다. 그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조선시대 무덤 전공자다. 지금껏 본 미라만도 20여구 가까이 된다. 하지만 그가 본 미라의 대부분은 육안으로 확인한 뒤 다시 화장되기 일쑤였다. 문중에서는 조상들의 미라를 일반에 공개하기를 꺼렸다.

국내에 보존되어 있는 미라는 단국대 박물관에 있는 어린이 미라 한 구뿐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결정이 내려졌다. 종중 회의에서 미라를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연구진은 염습 해포 작업을 즉시 중단하고, 관을 통째로 고려대 박물관으로 옮겨왔다.

고려대 의대 병리학 교수인 김한겸 박사(48)가 ‘미라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하루가 지난 9월7일 오전이었다. 박물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그는 의대 학장이자 법의학자인 황적준 박사와 함께 박물관으로 갔다. 관 해체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전인데도 더위에 몸이 후끈거렸다. 과거 과학수사연구소에서 근무한 경험으로 그는 밖에서 부검하면 2시간도 안되어 시체가 부풀어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시 해포 작업을 멈추게 한 뒤 앰뷸런스를 불러 고려대병원 해부학교실로 미라를 옮겼다.
미라는 해부학교실의 실험대 위에 눕혀졌다.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내자 검붉은 색깔의 몸통이 드러났다. 피부를 눌렀더니 쑥 들어갔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정도로 탄력이 살아 있었다. 세포의 핵만 없어졌을 뿐 모든 조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상태가 완벽했다. 즉시 연구팀이 꾸려졌다. 김정혁(고려대 의대 진단방사선과학교실)·엄창섭(고려대 의대 해부학 교실)·신경진(연세대 법의학과) 교수 등 의학자와 고려대 박물관 연구진, 출토 복식 전문가인 박성실 교수(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등이 연구진에 참여했다.

해포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었다. 미라가 입고 있던 홑바지의 허리끈에서 ‘병인 윤시월’이라는 한글 붓글씨가 발견된 것이다. 장례 날짜로 추정되었다. 회곽 구조나 이중관에다 맞물림과 놋쇠못을 같이 썼다는 점에서도 임진왜란 이전의 무덤이라는 점이 분명했다. 출토된 옷이 16세기 초반 양식이라는 점도 확인했다. 이로써 사망 연대가 1566년(명종 21년)으로 확정되었다.

육안으로 본 미라의 키는 153.5cm였다. 약간 비만형으로 영양 상태는 좋아 보였지만, 오른쪽 옆구리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의료진의 육안 소견은 암 덩어리 같다는 것이었다. 방사선과에 의뢰해 좀더 정확한 사인 판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밤 10시. 병원이 조용해졌을 때, 미라는 고려대병원 지하 방사선과로 옮겨졌다. 환자 이름은 ‘윤미라’. 그 뒤부터 연구진 사이에서 파평 윤씨의 미라는 윤미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X선 촬영을 한 결과 배에서 조그만 뼈 모양이 보였다. 아이가 틀림없었다. 내친 김에 자기공명영상(MRI) 검사와 전산화 단층 촬영(CT)까지 마쳤다. 몸 안에 수분이 충분해야 가능한 초음파 검사는 실패했다. 사인은 자궁 파열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박물관측은 원형 보존이 중요하다며 부검을 반대했다. 의료진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러나 김한겸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마침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중국 마왕퇴 미라 전시회>를 본 후 ‘필이 꽂혀 있던 상태’였다. “어떻게든 열어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연구진이 다 빠져나간 뒤 홀로 시체보관소로 내려갔다. 그리고 윤씨 미라를 꺼내 몰래 외음부를 벌려 보았다. 죽은 지 4백30년이나 지난 뒤였지만 부드럽게 벌어졌다. 그리고 질 바로 안쪽으로 아이의 머리가 보였다. 산모는 산통의 막바지에 아이와 함께 숨진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황적준 학장을 찾아가 부검 승낙을 받아냈다.

부검은 수월했다. 칼의 저항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살이 부드러웠다. 뱃속 오른쪽 부분에 검붉은 피가 뭉쳐 있었다. 자궁 파열로 인한 사망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태아의 성별이 남아라는 것도 확인했다. 내장에 남아 있는 내용물에서는 국화·회양목 따위 꽃가루와 선충류의 알로 보이는 물질이 검출되었다.

미라가 상류층 여인이었는데도 장 속에서 선충류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익히지 않은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뜻했다. 김교수는 “아마 채소에 묻어 있는 인분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꽃가루의 정체도 관심거리였다. 미라는 겨울에 죽었고, 꽃가루가 호흡기를 통해 들어갈 수 없는 계절이었다. 연구진은 미라가 임신부였고 장 속에서 다양한 꽃가루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서 꿀을 마셨을 것으로 추정했다. 양봉협회에 문의한 결과, 과거에는 지금 같은 정제 기술이 없어 꿀에 꽃가루가 많이 섞여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는 미라가 누구였는지를 확인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습의에 적혀 있던 ‘병인 윤시월’이라는 기록, 무덤에서 함께 발견된 편지, 단령에 붙어 있던 노사(해오라기) 문양이 직조된 흉배, 파평 윤씨 족보 등이 주인공을 찾는 데 소용되는 단서였다. 묘에서 발견된 한글 편지는 인종의 후궁인 숙빈이 쓴 것이었는데,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부모인 윤원량(1495~1569년) 부부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흉배 문양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정4품 벼슬을 지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윤원량의 가계를 조사한 결과, 미라는 윤원량의 아들인 윤 소(1515~1544년)가 첩한테서 얻은 딸로, 대략 1535~1545년에 출생해서 1566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20대 초·중반에 사망했다는 치아 감정 결과와도 일치했다.
윤원량은 당시 문정왕후의 오빠이자, 실권을 쥐고 있던 윤원형의 형이었다. 미라가 사망할 당시 윤원량은 생존해 있었다. 미라는 서얼 신분이었는데도 후한 장례를 치렀다. 당시 윤씨 가문이 조선 최대의 세도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친정에서 아이를 낳다가 숨진 손녀를 위해 할아버지인 윤원량이 장례를 주관했을 것으로 연구진은 추정했다.
그녀는 어떻게 미라가 되었을까. 조사 결과 지형적인 원인보다는 매장 풍습과 사망 시기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관이 회곽으로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고, 사망 시기가 윤시월(양력 12월께)로 겨울이었다는 점이 부패를 막는 데 기여했다. 또한 임신부여서 몸에 지방이 많았고, 이것이 시랍 현상을 촉진해 더 이상의 부패를 막는 데 일조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연구진은 본다.

연구팀은 나아가 미라의 얼굴을 생전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도 고려했으나 포기했다. 대학 박물관 예산으로는 수천만원이나 하는 복원 비용을 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파평 윤씨 미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고려대 연구팀은 국내 무덤에서 미라 2구를 더 발굴해 보관하고 있다. 이들은 조만간 외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대로 국내 최초의 ‘미라 연구센터’를 세울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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