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비디오에 ''뮤직''이 없다
  • 성우제 ()
  • 승인 2000.11.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액 제작비 들여 음반 판매 위한 ‘화제 만들기’ 치중… 작가주의 표방한 ‘작품’ 극소수
요즘 한국 대중 음악계에서는 좋은 음악을 만들고 노래만 잘 불러서는 절대로 스타덤에 오를 수 없다. 음악보다 더 중요한 음악 외적인 요소가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뮤직비디오이다. 뮤직비디오는 유행 차원을 넘어 가수들 사이에 경쟁을 벌이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뮤직비디오는 ‘선택 사양’이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는 신보를 발표할 때 반드시 곁들여야 하는 필수 장르로 돌변했다. 올해부터는 주류를 형성하는 가수들 사이에 뮤직비디오를 두고 새로운 경쟁이 벌어졌다. 유명한 배우·탤런트를 등장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제작비 경쟁까지 벌이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뮤직비디오에 1억원을 들이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제작비 3억원짜리 ‘대작’인 스카이의 <영원>이 나오더니, 올해 들어서는 제작비가 7억∼8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사실을 확인하기가 불가능하지만, 그 정도는 들였다고 발표해야 일단 화제를 모을 수 있다. 조성모·유승준 같은 슈퍼스타뿐 아니라, 김성집 같은 신인까지 7억원대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가수들의 ‘작품’인 음반보다 2~3배가 훨씬 넘는 제작비를 홍보 도구에 투입하는,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래를 하는 가수들이 ‘뮤직’이 아닌 ‘비디오’에 그만큼 신경을 쓰는 까닭은, 비디오의 인기가 흥행의 보증 수표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음악 수용자가 ‘노래만 들으면 심심하다’는 영상 세대로 완전히 교체되었고, 그로 인해 라디오는 대중 음악의 주도권을 케이블TV 음악 채널에 넘겨주었다.

음악 채널 m·net와 KMTV는 24시간 대부분을 뮤직비디오로 채우고 있으며,
인터넷 또한 대중 음악에서 날이 갈수록 위력을 더하고 있다. 최근 3인조 남성 힙합 그룹 CB MASS는 인터넷 동영상 홍보만으로 데뷔 앨범을 3만장이나 팔았다. 가수들이 홍보할 수 있는 매체 환경이 급속하게 변한 것이다.

환경 변화와 더불어 한국에서 뮤직비디오가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가수 조성모가 성공한 데서 연유한다. 1998년 <투 헤븐>으로 데뷔한 조성모는 뮤직비디오 마케팅의 최대 수혜자이다. 한국에서 처음 시도한 이른바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는 이병헌·허준호·김승우·황수정 같은 배우들을 대거 등장시킴으로써, 음악으로 보자면 평범한 신인을 김건모 이후 최고 엔터테이너로 밀어올렸다.

이후 조성모는 지난 8월에 발표한 <아시나요>와 최근의 <다짐>에 이르기까지 그 전략을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있으며, 다른 가수들도 그 방식을 벤치마킹해 속속 대열에 합류했다. 특정 장르나 가수의 스타일이 인기를 얻으면 모두 따라하는 대중 음악계의 해묵은 악습이 뮤직비디오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뮤직비디오는 이제 가수들이 음반을 발표할 때 음반 못지 않게 관심을 모으는 장르로 떠올랐다. 신종 장르인 뮤직비디오는 ‘스타 감독’도 여럿 배출했다. <투 헤븐> 이후 조성모의 뮤직비디오를 모두 연출한 김세훈, 최근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 H.O.T의 <아웃사이드 캐슬>을 만든 홍종호, 신승훈의 <전설 속의 그 누군가처럼>, 이승환의 <그대가 그대를>을 연출한 차은택 감독이 뮤직비디오의 ‘삼두마차’로 불린다.

뮤직비디오의 예술성을 평가하는 1차 잣대는 음악을 영상으로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 하는 것이다. “음악이 영상과 결합하면 상상력을 증폭하는 효과를 낳는다. 영상이 음악과 따로 논다면 그것은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좋은 뮤직비디오라고 할 수 없다”라고 m·net 김종진 기획제작국장은 말했다.

뮤직비디오는 크게 보아 세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가수가 등장해 립싱크로 노래하는 스타일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나 드라마 삽입곡으로 만든 이미지 위주의 작품이다. 마지막은 조성모를 스타덤에 올려놓음으로써 대세를 이루게 된 드라마타이즈(스토리텔링)이다.

구미 팝음악계와 달리 한국에는 제작비나 제작자가 쏟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팬들에게 진정으로 서비스하는 뮤직비디오가 그리 많지 않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음악과 영상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제3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같은 가수라도 뮤지션보다는 엔터테이너들에게서 나타나는 거의 공통된 것인데, 가장 대표적인 엔터테이너로는 조성모를 꼽을 수 있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애절한 사랑 노래가 주특기인 조성모의 뮤직비디오는, 대중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화제작일지는 몰라도 작품을 하나하나 뜯어서 보는 마니아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첫 작품인 <투 헤븐>까지만 해도 조성모의 뮤직비디오는 가수가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 형식의 새로운 스타일이어서 주목되었다. 그러나 <슬픈 영혼식> <가시나무> <아시나요>에 이르러서는 ‘식상하다’는 평을 듣는다. m·net 뮤직비디오 동호회 ‘뮤지뮤지’의 시삽 김효진씨는 “뮤직비디오는 그 노래의 독특한 내용과 분위기를 드러내야 하는데 <가시나무>의 영상에 노래 <아시나요>를 붙여도, 그 반대로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조성모뿐만 아니라 대다수 엔터테이너들의 뮤직비디오가 이같은 성격을 띠는 까닭은, 뮤직비디오를 팬 서비스 차원의 작품으로 제작하기보다 화제를 불러일으켜 음반 판매와 연결하려는 홍보용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웬만한 해외 촬영도 화제가 되지 않고, 유명 배우 누구가 출연했다는 것도 뉴스가 아니다. 가장 큰 관심사는 제작비를 얼마 들여 얼마나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뮤직비디오가 음악에 맞는지 여부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빼어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뮤지뮤지 동호회가 꼽은 수작 가운데 하나는 지난 1월에 발표된 진 주의 <가니>이다. 홍종호 감독이 연출한 <가니>는 남녀 버전 2종으로 제작되었는데, 남녀가 제각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만 나온다. “그 작품은, 헤어졌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들이 왜 울까,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뭘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한다. 보고 듣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같은 뮤직비디오가 좋은 작품인 것 같다”라고 김효진씨는 말했다.

뮤직비디오는 CF에 비해 훨씬 길고, 영화보다는 훨씬 짧다. 음악에 종속된 장르라고는 하지만 CF보다 자유롭고 영화에 비해 위험 부담이 적다는 이유로, 뮤직비디오는 CF나 영화 감독들에게 제법 인기가 높은 편이다. 음악을 대사 없이 영상으로 해석하고 풀어내는 뮤직비디오는, 감독들에게는 음악에서 받는 감흥을 토대로 3~10분 동안 자기 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르인 것이다.

비교적 호평을 받는 뮤직비디오를 발표할 뿐 아니라 감독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가수들은, 음악을 스스로 만들고 음악적 자부심을 뮤직비디오에서도 드러내는 뮤지션들이다. 신승훈·이승환·서태지 같은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는 무명 배우가 등장해도, 제작비 자랑을 하지 않아도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이승환의 <당부>는 지난해 m·net가 제정한 뮤직비디오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제2회인 올해에는 11월24일 리틀엔젤스회관에서 열린다).
감독들은 이런 뮤지션을 선호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음악을 만든 당사자와 대화가 가능하고, 그들의 음악은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어서 얘깃거리를 많이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뮤직비디오 감독은 “촬영 당일에 와서 백댄서처럼 춤만 추고 가는 가수도 많다. 뮤직비디오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그런 가수를 보면 참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음반보다 더 화제를 모으기도 하지만, 뮤직비디오는 어디까지나 음악을 포장하고 홍보하는 ‘종속 장르’이다. 영화 음악이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면, 뮤직비디오는 없어도 그만인 프로모션 차원의 홍보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음반 판매를 위한 화제 만들기에 치중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장르이기도 하다. 구미 팝음악이 보여주었듯이, 뮤지션의 음악적 상상력을 영상으로 펼칠 수 있는 ‘제3의 장르’인 것이다.

지난 10월 영국의 유명 록그룹 라디오헤드는 4집 음반을 발표하면서 상업적 목적을 가진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지 않겠다는 ‘작가주의’를 선언했다. 음악을 뮤직비디오로 포장하지 않고 음악 자체로 평가받겠다는 뜻이다. 뮤직비디오를 ‘몇억원을 들여 어떻게 만들었다’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뒤 그것을 음반 판매량과 이어보려는 상업성이 판을 치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