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몸에 더 가까이…인사동의 대변신
  • 성우제 기자 (wootje@e-sisa.co.kr)
  • 승인 2000.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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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4일 ‘잿빛 보도’로 시민맞이…‘손으로 만지게 한 디자인’ 돋보여
서울에서 유일한 전통 문화 거리, ‘도시의 허파’로 불리는 인사동 큰 길이 단장을 마치고 지난 10월14일 시민들을 맞아들였다. 안국동에서 종로에 이르는 큰 길은 잿빛으로 덮였으며, 전시회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사라지면서 인사동 하늘도 제 모습을 찾았다. 시민들은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에서 예전보다 훨씬 상쾌한 마음으로 그 거리를 걸을 수 있다.

그 상쾌함은 먼저 큰길 바닥 포장에서 연유한다. 바닥 포장의 주 재료는 전통 점토 벽돌로 잿빛을 띤다. 안국동쪽 입구에서부터 인사동 사거리까지 깔려 있는 이 기와 색깔이 인사동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한다. 고풍스럽다기보다는 다소 생소해 이국적인 느낌도 주지만, 예전에 느낄 수 없던 단정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큰 길 포장과 더불어 새로운 인사동길의 특징은 물·식물 같은 자연 요소를 적극 도입했다는 점이다. 안국동과 종로 쪽의 양 입구에서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물이다. 인사동 사거리를 경계로 북(北)인사동길로 명명된 안국동 쪽에는 10m 길이의 물길이 만들어져 사시사철 작은 시내처럼 물이 흐른다. 남(南)인사동길 초입에도 물동이 모양의 작은 분수대가 만들어져 쉬지 않고 물이 넘친다.

인사동길에는 양쪽 끝에 새롭게 조성한 작은 공원을 중심으로 나무 수십 그루가 심어졌다. 회화나무·소나무·단풍나무·백일홍·느티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과 어울리는 것은 북인사동에 만들어진 작은 텃밭 30개이다.
서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크고 작은 골목 24개를 강조한 점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골목 입구에는 전돌 대신 흰색 장대석을 깔아 그곳이 골목 입구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밤길을 밝히는 가로등이 새로 서고, 양쪽 입구에 나무로 만든 열주가 세워져 문화 이벤트를 알리는 현수막을 드리우게 했다. 인사동이 10개월 공사 끝에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 것이다.

서울시가 36억원을 들여 새로 다듬은 인사동길은,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 때문에 인사동 사람들로부터 대체로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불평도 만만치 않게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큰 길 양켠에 놓인 화강석 돌 의자이다. 5m 간격으로 배치된 돌 의자는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고 무단 주차를 방지한다는 뜻으로 놓였으나, 분위기를 해치는 대표적인 흉물로 비판받고 있다.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언제든 앉아 쉴 수 있는 구실도 하지만, 돌 모양이 우악스럽고 보행자들이 자칫 부딪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사동길을 디자인한 건축가 김진애씨(서울포럼 대표)는 “목적이 분명한 도시 설계와 달리, 길 디자인은 참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사용하는 길은, 누구의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씨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사람들이 인사동 디자인을 ‘그냥’ 쓰게끔 하는 것이다.

보도의 색상이나 돌 의자에 관한 이런저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사동길에서 돋보이는 것은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라 ‘사용하는 작품’으로 디자인 개념을 잡았다는 점이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중요한 것이지만, 시각 외에 잃어버린 몸의 다른 감각들을 새삼 되찾게 하고 싶었다”라고 김진애씨는 말했다.
인사동길은 사람들이 앉거나 기댈 ‘거리 가구’가 많다. 조형물도 멀리서 보면서 감상하기를 강요하는 높은 위치의 ‘작품’이 아니라, 누구든 밟고 만질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를테면 북인사동길의 물길이나 남인사동길의 작은 분수는 어느 때든 손을 담그고 물장난을 칠 수 있다. 김진해씨는 ‘몸에 닿고 손으로 만지게 한 디자인’에 중점을 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의 건축이나 도시는 지나치게 시각 위주이다. ‘만지고 기대고 싶어하게 하는 것’이 사람 냄새 나는 도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길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공공미술 기획가 박삼철씨(아트컨설팅서울 소장)는 “돌 의자 같은 것을 보면 공간을 사적인 취향으로 규정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라면서, 그러나 인사동길에서 공공 디자인의 기본 개념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가로 설계는 ‘보이는 공간’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는데, 인사동길은 ‘사용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는 것이다.

인사동길을 역사문화탐방로로 단장하면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깨끗하게 꾸민 거리가 전통 문화 분위기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인 식당·유흥 거리로 변화하는 데 ‘촉진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1996년부터 인사동에 관심을 기울여 오면서 ‘인사동 지킴이’라는 별명을 얻은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 최정한 사무총장은 “세월이 축적된 곳을 단기간에 변화시키는 바람에 지키고 가꿔 가려는 분위기가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거리가 정비되면서 건물 임대료가 오르고, 운영에 압박을 받는 작은 가게들이 시장 논리에 따라 더 빨리 퇴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뉴욕의 소호는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화랑들이 첼시로 옮겨간 탓에, 미술 거리에서 패션과 소비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한때 연극·공연 거리였던 동숭동도 불과 몇 년 만에 그 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추세로 보아, 인사동길 단장은 인사동의 정체성을 더욱 빠른 속도로 변화시킬는지 모른다.

현재 인사동에서는 값싼 중국 공예품이 한국산인 양 외국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거리의 품격을 유지하게 하는 화랑·골동품상·필방·고서점 들은 하나 둘 인사동을 떠나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인사동길 단장이 그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할지도 모른다.

“행정이 주도하는 환경 개선 사업은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하는 작은 가게들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다. 행정은 뒤에서 세심하게 살피면서 환경만 조성해 주면 된다”라고 최정한씨는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인사동을 지키고 가꾸는 지름길은 인사동 가게들의 자구 노력이다.

새롭게 단장한 인사동길이 인사동을 전통 문화가 살아 숨쉬는 거리로 자리 잡게 해줄지 여부는 디자인 문제가 아니다. 인사동의 미래는 그 디자인을 사용하고 손질해 가는 인사동 상인과 시민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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