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지중해 향해 닻 올리는 ''인천학''
  • 이문재 기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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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포럼 창립·죽산 조봉암 세미나 개최·인천학총서 출간 등 활발
인천은 지금 밀물이다. 바다와 하늘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동아지중해론을 키워드로 삼아 인천학의 토대를 다지고 있는 인하대 국문학과 최원식 교수(<창작과비평> 주간)에 따르면, 탈냉전 시대와 남북 화해 시대를 맞아 단절의 바다 황해가 동아시아의 지중해에서 부활하고 있다. 그 동아지중해의 거점(허브) 도시가 바로 인천이라는 것이다.

21세기 서해안 시대라는 슬로건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인천은 안팎에서 잊혀 있었다. 분단 이후 근대화 프로젝트는 경부선 중심 축으로 진행되었거니와, 인천은 서울의 위성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1883년 개항 이래 인천은 한국 현대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개항 이후부터 일제 강점기에는 제국주의의 ‘하역장’이었고, 해방 공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극심한 이념의 각축장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인천은 줄곧 냉전 체제의 그늘에 들어 있었다. 항구이되 바다가 없고, 신흥 도시가 아닌데도 ‘뿌리’가 없었던 것이다.

인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관련 학자나 향토사가, 지역 유지들에 의해 간간이 제기되어 오다가 1975년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130쪽 상자 기사 참조)이 출범하면서 하나의 전기를 맞았다. 차분하게 지역 문화운동을 전개해 오던 새얼문화재단은 1993년 겨울에 계간 <황해문화>를 창간해 마침내 인천학의 한 ‘거점’을 마련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다양한 시민운동이 어깨를 겯기 시작했다. 인하대 대학원에는 인천학이 개설되었고, 인천대에는 동북아발전연구원이 간판을 달았다. 지난해부터는 다인아트 출판사(대표 유봉희)가 <인천학신서>를 발간하고 있다.

지난 10월12일에는 인천대 교수와 지역 경제인, 시민 등이 동아시아포럼을 창립해 제1회 포럼을 열었고, 오는 10월20일에는 새얼문화재단 창립 25주년 기념 심포지엄 <죽산 조봉암의 정치적 리더십과 인천>이 인하대 지계층 강당에서 열린다. 한편 10월14일부터 22일까지 인천세계춤축제가 열리고 있다. 인천학이 소년기를 거쳐 청년기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송희연 교수(인천대 동북아통상대학장)와 신하수 인천일보사 사장을 초대 공동의장으로 선출한 동아시아포럼이 처음으로 연 포럼에서, 강사로 초청된 동국대 윤명철 교수(해양문화연구소장)는 동아지중해론을 전개하며 인천이 환황해권이 아니라 동북아 국제 질서의 중핵(core)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1997년 중국 저장성에서 뗏목을 타고 인천까지 항해하며 선사 시대부터 한반도와 중국 강남 지역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한 윤명철 교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황해·동중국해·남해·동해를 동아시아지중해라고 명명한다. 인천학이 동아지중해를 환황해권으로 작게 인식하고 있는 것에 견주어 더 확장된 ‘지중해론’이다. 윤교수는, 북으로는 만주와 연해주,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차지한 고구려가 서해와 동해 해상권을 장악하며 동북아 질서를 재편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추며, 통일 한국 시대의 인천이 새로운 동아지중해 시대의 중핵 조정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죽산 조봉암 심포지엄은 두 주제로 나뉘어 진행된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빙 연구원인 이현주 박사가 <조봉암의 정치 활동과 인천>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하고, 두 번째 주제는 조봉암의 정치적 리더십으로, 박태균 박사(서울대 국제지역원 초빙 교수)가 발표한다.

이현주 박사는 그간 조봉암에 대한 연구가 일제하 사회주의 혁명가로서의 활동과, 1948년부터 1959년까지 서울에서의 정치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면서 “1945년부터 3년 동안 죽산은 인천에서 처음으로 대중과 접촉하며 정치가로 거듭났다”라고 말했다. 해방 공간에서 조선공산당과 민족통일전선이 갈등할 때, 후자를 선택하며 폭넓은 포용력을 발휘한 죽산의 정치적 실험들이 인천을 무대로 하여 펼쳐졌다는 것이다.

박태균 교수는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 관련 보도를 분석하면서 죽산의 리더십에 관한 평가를 교정한다. 박교수는 죽산의 사회주의적 노선이 결코 장애물이 되지 않았으며, 진보적 인물을 갈망해온 대중에게 수용되면서 리더십의 바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다른 사람, 특히 아랫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죽산의 성격이 리더십을 강화한 큰 요인이었으며 죽산의 큰 포부와 신념이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 죽산을 통해 박교수가 추출한 리더십의 현재성은 다음과 같다. ‘정치 지도자는 자기 정책과 이미지가 뚜렷해야 하며, 리더십은 상명하복이 아니라 상하가 교호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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