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새로운 실험, ''줌 렌즈''로 역사 읽기
  • 박성준 기자 (snype0sisapress.comkr)
  • 승인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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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상 강조하는 미시사적 접근법, 한국사 연구에 새 바람
국내 역사학계 일각에 미시사(微視史)의 물결이 일고 있다. ‘국가’ ‘민족’ ‘계급’ ‘식민주의’ ‘근대성’ ‘자본주의’….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역사학이란 이들 개념을 과거의 특정 시기에 대입해 객관적 설득력을 갖는 거대 이야기를 축조하는 학문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역사학의 개념과 실제는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우선 역사 연구 대상이 변화했다. 국가와 민족, 정치 지도자와 지배 계급은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지배적인’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한다. 대신 그 자리를 서양 중세 시대 이탈리아의 한 방앗간집 주인이나 조선 후기 경남 지역의 일개 노비 일가 등 평범한 개인이나 소집단이 차지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문제 삼는 이른바 ‘역사적 사건’과 소재도 달라지고 있다. 1730년대 프랑스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일어난 ‘고양이 학살 사건’이 세계적인 역사가의 주요 분석 소재로 떠오르는가 하면, 과거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포르노그라피, 역사와 하등 상관이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설탕 등 사소한 먹을거리마저 버젓이 역사학의 정식 연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아래 목록 참조). ‘역사에 대한 미시적 접근’, 이른바 미시사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미시사 전도사’로 불리는 조한욱 교수(한국교원대)의 설명을 빌리면, 미시사는 크게 네 가지 특징이 있다. ‘두껍게 읽기’(‘치밀한 묘사’로도 부름)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깨뜨리기’가 그것이다. 두껍게 읽기란 미국의 이름 난 상징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의 개념을 확장한 것으로, 하나의 역사적 사실(또는 사건)을 다양한 역사적 층위에서 읽는 방식을 말한다. 다르게 읽기는, 역사적 사실을 다른 시각으로 읽어 본다는 뜻이다.

작은 것을 통해서 읽기는, 예컨대 동학농민전쟁을 읽을 때 농민군·관군·대외 정세 등 큰 집단 또는 큰 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호남의 한 농가 또는 농민전쟁과는 무관한 작은 사건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깨뜨리기는 이같은 방법을 통해 결국은 기존 역사상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부산대 곽차섭 교수는 ‘영화 기법에 비유할 때, 거시사가 롱샷으로 본 것이라면 미시사는 줌으로 사물을 당겨 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시사적 접근법은 이탈리아·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말 그대로의 미시사, 독일의 일상사 연구 그리고 미국의 신문화사 같은 조류가 합쳐진 것이다. 이 접근법이 국내에 도입되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중후반. 당시만 해도 새 방법론에 익숙치 않았던 국내 학계는 이를 흔히 있는 ‘사례 연구’와 혼동하며 그 잠재력을 과소 평가했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 특히 지난 8월 한국역사학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일군의 역사학자가 미시사를 한국사 연구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미시사 옹호론자들은 대부분 “기왕의 역사학은, 역사의 분석 단위를 계급이나 집단으로 추상화했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다. 미시사는 분석 단위를 ‘확인 가능한 개인’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역사학에 구체성을 불어넣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며 기존 방법론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한 개인의 일대기나 가족·소집단의 사회적·문화적 체험이 민족이나 민중 등 이른바 ‘전체’의 체험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접근 대상일 수 있다는 미시사가들의 ‘신념’은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사 연구에도 부분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백승종 교수(서강대·사학과)의 작업이 대표적이다.
백교수는 서양사 연구 방법론의 한 조류로만 머물러 왔던 미시사적 접근법(이론)을 한국사라는 구체적인 ‘현장’에 접목하고 있다. 백교수는 〈한국 사회사 연구〉(일조각·1996년), ‘사노비 흥종 일가, 17~18세기 경상도 단성현 도산면의 작은 세계들’, ‘18~19세기 고리대금업과 농촌 경제-전라도 태인현 고현내면의 경우’와 같은 저서·논문에서 미시사의 렌즈를 통해 한국사를 새롭게 해석한다.

최근 그가 엮은 〈아버지, 난 누구에요〉(궁리)도 주목되고 있다. ‘N세대가 쓰는 이 땅의 작은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지난 1학기 백교수의 강의를 들은 학생 약 40명이 자기네 성장사와 가족사를 실명(實名)으로 써내려 간, 낯선 형식의 ‘역사책’이다.

이같은 ‘현장 실험’과는 별도로, 이론 정련화와 대중화 작업도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 3월 발족해 〈역사와 문화〉라는 학회지를 창간한 문화사학회가 이들 작업의 구심점이다. 대중화를 위한 저술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조한욱 교수는 문고본 형식의 개론서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책세상)를 펴냈다. 김기봉 박사는 미시사는 물론 역사 철학·역사학 방법론에 관한 최신 경향을 광범위하게 논의한 책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푸른역사)를 통해 거시사의 ‘결함’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미시사론자들은 미시사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대’ 역사학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족 사학·민중 사학 등 ‘주류 진영’의 반응은 비교적 냉담한 편이다. 역사학을 실천 학문으로 전제할 때, 미시사적 방법론이 특히 식민지 경험·분단 극복 등 ‘민족 문제’가 산적한 오늘날의 현실에 과연 얼마나 유용한 교훈과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조한욱 교수는 “특히 기성 학자일수록 미시사를 대하는 태도가 보수적이다”라고 학계의 분위기를 전한다. 결국 이 문제는 대화와 토론과 연구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아직 채굴되지 않은 광맥’ 미시사는 그렇게 토론을 기다리며 한국 역사의 한복판에 뛰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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