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선정 2003년 문화 키워드 10선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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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짱’ ‘어록’ ‘사투리’도 인기
2003년 한 해,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살았을까? <시사저널> 문화팀에서는 올해 우리의 삶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10개의 문화 키워드를 뽑아 2003년을 한 해를 정리해 보았다. 이 10개의 키워드를 놓고 대중문화 전문가 세 사람이 각각의 키워드가 보여준 사회적 영향력, 사회적 함의, 미래의 확장 가능성을 감안해 순위를 매겼다.

키워드 영예의 1위는 ‘강효리’가 차지했다. 정가의 신데렐라 강금실 법무부장관과 연예계의 신데렐라 이효리의 합성어인 이 말은 강금실 장관의 애칭으로 쓰이고 있다. ‘강효리’는 강금실 신드롬과 이효리 신드롬을 모두 반영하고 있는데, 이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이 아니라 ‘능력과 섹시함’을 겸비한 여성이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 신드롬 중에서 먼저 바람을 일으킨 것은 이효리 신드롬이었다. 초여름, 가슴 성형 논쟁으로 시작된 ‘효리 장세’는 여름을 지나면서 눈덩이처럼 커져 완연한 신드롬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효리의 사진과 기사가 연일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했고 효리 스타일이 여름 길거리 패션계를 강타했다.

10월 들어 강금실 장관이 일간지 기사에 자주 등장하면서 강장관은 효리만큼 기사에 자주 나온다는 의미로 ‘일간지의 강효리’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주로 스포츠신문의 정치 기사를 통해 유포된 이 말은 이후 정치인들 사이에서까지 회자되면서 강장관의 애칭으로 굳어졌다.

여름,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되었지만 이효리 신드롬과 강금실 신드롬은 꺾일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11월30일, 대한민국영화대상 시상식장에서 특유의 허리춤으로 장내를 달군 이효리는 연말 시상식 무대의 최고 초대 손님으로 각광받고 있다. 강장관 역시 라이벌 ‘추다르크’(추미애 의원)가 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탈락함으로써 더욱 주가를 높이고 있다.

강금실과 이효리. 세대도 다르고 일도 달라 전혀 어울려보이지 않는 사이지만 이들이 부각되는 과정은 비슷한 구석이 많다. 갑자기 신데렐라로 부각된 이들은 모두 왕자님의 인기를 뛰어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발탁 인사로 장관이 되었지만 이제 강장관의 인기는 노대통령을 능가한다. 이효리 역시 오락 프로그램 사회자로 데뷔하면서 개그맨 신동엽의 도우미 역할을 했지만 이제 신동엽의 인기를 앞선다.

둘 다 거침없는 언변으로 화제 제조기가 되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의원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코미디야, 코미디”라고 말한 강장관이나, 어릴 적 도둑질한 경험까지 털어놓는 이효리는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충분했다.

둘은 비슷한 비난을 듣고 있기도 하다. 강장관이 기대만큼 사법 개혁의 전도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듣는 것처럼 이효리 역시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음반 판매량이 저조해 속빈 강정이라는 비아냥을 사고 있다.

올해의 ‘문화’ 키워드 2위에는 ‘다모 폐인’이 올랐다. ‘다모 폐인’은 MBC 퓨전 사극 <다모>를 좋아하는 네티즌의 모임으로, 정점에 이른 ‘폐인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프로그램 게시판에 2백만 개가 넘는 글을 올리고 <한성 좌포청 신보>니 <다모일보>니 하는 신문까지 발행하는 이들의 행동은 일본의 오타쿠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마니아 문화의 전형이다.

‘다모 폐인’의 전신은 ‘디시 폐인’으로 볼 수 있다. 주면야행(낮에 자고 밤에 웹서핑)하고 삼시면식(세 끼를 모두 라면으로 때움)하던 ‘디시 폐인’의 아류가 새로운 형식의 퓨전 사극을 보고 폐인의 방식으로 수용하면서 ‘다모 폐인’이 형성된 것이다.

<다모>의 성공과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은 정치풍자적인 퓨전 사극의 유행이다. 왕과 신하들이 대립해 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보여준 <황산벌>이나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살인 사건을 패러디한 <낭만자객>처럼 <다모>에도 정치 코드가 담겨 있다. 부패한 절대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는 주제 의식과 주인공의 갈등 구조가 <모래시계>를 빼닮은(하지원(고현정) 이서진(박상원) 김민준(최민수) 권오중(이정재)) <다모>의 반란군은, 노동자들의 자살이 잇따르면서 주목되고 있는 민주노동당을 연상시킨다. 이종격투기·인터넷 소설에도 네티즌 열광

3위는 ‘바람난 가족’이 차지했다. 장기 불황 때문에 가족 동반 자살이 잇달아 발생하는가 하면 부부 스와핑이 사회 문제가 되고 싱글족과 동거족이 하나의 주거 형태로 자리 잡은 올해는 ‘가족 해체’의 해였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가족 구성원들의 외도 문제를 다룬 영화 <바람난 가족>과 동거를 소재로 한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올해의 문화 키워드 4위는 ‘얼짱’이다. 얼굴이 잘생긴 사람을 뜻하는 이 말은 네티즌들의 은어로 사용되다가 이제는 일반인들도 알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졌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얼짱’으로 인기가 높았던 박한별 등이 스타로 부각되면서 ‘얼짱’은 신인 스타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았다.

얼짱 신드롬은 스타의 생산과 유통, 소비에서 중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획사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대중 스타와 달리 얼짱은 네티즌들이 추대해서 스타로 떠올라 ‘상향식 스타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팬들과 인터넷 카페 게시판을 통해서 늘 접속해 있는 얼짱은 대중 스타와는 다른 ‘대안 스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5위는 이종격투기 열풍을 나타내는 ‘쌈박질’이다. 지난해 월드컵에 열광했던 국민들은 올해는 피와 살이 튀는 이종격투기 경기를 보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중계 방송이 되고 신문에 고정 지면이 실리면서 이종격투기 다이어트가 시작되고 테마파크가 생기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6위는 인터넷 소설의 하나인 <존나세>이다.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가 연달아 성공하면서 인터넷 소설은 새로운 대중 문화의 매체로 자리 잡았다. 인터넷 소설의 일반적인 내용은 평범한 여고생이 킹카(잘생긴) 남학생을 사귀며 겪는 우여곡절 연애담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존나세>에 이르면 변형이 시작된다. <존나세>의 주인공은 키 190cm에 몸무게 40kg으로, 병역 기피 의혹에 시달린 정치인의 아들을 연상시킨다. <존나세>의 주인공은 IQ 600으로 60 대 1로 싸워도 지지 않는 세계 0위 킹카이다. 이런 황당한 내용은 현실성 없는 기존 인터넷 소설의 내용을 풍자한 것으로 인터넷 소설에 대한 안티 성격을 가지고 있다.

7위는 ‘어록’이다. ‘놈현(노무현) 어록’ ‘김제동 어록’ ‘차명석 어록’ ‘<황산벌> 어록’ 등 올해 인터넷은 어록 풍년이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대통령 노릇 못해먹겠다”라는 등 적나라한 화법을 구사한 노무현 대통령의 영향인지, 사람들은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한 줄의 카피에 열광했다. 다음은 올해 인터넷에 떠돈 대표적인 어록이다.

“이효리의 손에 맞아 죽으면? 전문 용어로 안락사죠.”(김제동 어록)

그레그 매덕스와 스타일이 비슷해 차덕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 않느냐고 묻자, “뭐 어쨌든 공 느린 건 똑같습니다.”(프로 야구 해설가 차명석 어록)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계백의 말에 “인간아, 호랑이는 가죽 땜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지는 거여.”(<황산벌>의 김선아 어록)

문화 키워드 8위는 ‘키워드’ 그 자체이다. 각 포털 사이트의 검색 키워드 상위에 오른 말들이 사회적 파급력을 갖기 시작하면서 올해는 키워드라는 말이 중요한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이는 미디어 채널의 다양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포털 사이트의 검색 기능이 미디어 기능을 담당하면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열쇠’인 키워드가 주목되는 것이다.

‘키워드’ 자체가 문화 키워드로 각광

이제는 검색 사이트마다 키워드 광고를 중요한 비즈니스 모델로 삼고 있다. <시사저널>이 처음 주간 검색 순위를 다룬 이후에 <동아일보> (클릭 이 주일의 키워드) <한국일보>(금주의 검색어)도 주간 검색 순위를 연재하고 있다.

9위에는 ‘안티 굿데이’가 선정되었다. 안티 굿데이 운동은 스포츠 신문의 선정성 문제와 연예인 인권 유린 문제에 대한 네티즌의 문제 의식이 구체화한 것으로, 김병현 선수 사건을 계기로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다. ‘<굿데이>의 ‘김병현 죽이기’에 격분한 네티즌들은 ‘<굿데이> 없는 아름다운 우리 세상을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굿데이> 폐간을 위한 네티즌 연대’를 조직했다.

10위는 ‘아쌀하게 거시기 해불자'로 대표되는 사투리이다.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 역을 맡은 배우 박중훈이 전투에 앞서 내뱉은 이 말은 올해 사투리 신드롬의 화룡점정이었다. 올해 사투리 신드롬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것은 그동안 ‘틈새 시장’으로 남아있었던 강원도 사투리가 <폭소클럽>과 <선생 김봉두>를 통해 빠르게 떠오른 것이다.

도움말:김유식(디시인사이드 대표)·변희재(문화평론가)·조희제(다음 검색본부 콘텐츠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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