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돌아온 문화 혁명가 서태지
  • 성우제 기자 ()
  • 승인 2000.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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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성·세대의식 담보한 한국 유일의 뮤지션… “포스트 서태지, 당분간 없을 것”
서태지는 20대 초반에 4년간 활동하고 은퇴한 ‘한 명의 가수’였다. 그가 남긴 작품은 정규 앨범 4장과 ‘절반의 컴백’으로 기록된 독집 1장뿐이었다. 가수가 퇴장하면 몇 달 만에 금방 잊히는 대중 음악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라질 때 못지 않은 팬들의 환호와 사회적 관심을 받으며 ‘온전하게’ 컴백했다.

팬들은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고, 한국 사회는 그의 작업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연예계에 별 관심이 없던 신문 사회면과 텔레비전 9시 뉴스는, 은퇴할 때와 같은 비중으로 그의 컴백을 보도했다. 서태지가 새 음악을 발표하는 9월9일부터는 그 음악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만만치 않은 사회적·문화적 파장이 예상된다.

그 파장은 비슷한 시기에 새 음반을 발표한 슈퍼 스타 조성모와 H.O.T.의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조성모와 H.O.T.가 미칠 영향력이 연예계와 그들의 어린 팬에 국한하는 것이라면, 서태지의 영향력은 가요계의 관심사인 음반 판매량과는 별개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청년 가수가 사회의 관심을 끄는 사회적 인사로 대접받는 이유는, 서태지라는 이름이 갖는 문화적 상징성 때문이다. 그것은 그에게 붙는 ‘주류 질서 전복자’ ‘문화 혁명가’ ‘10대들의 대통령’ ‘신세대 대표자’ 따위 수식어를 통해 금방 알 수 있다. 서태지는 연예 오락 차원을 넘어, 사회적 상징성을 갖는 한국 사회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가수인 것이다.

서태지는 한국 사회로 하여금 신세대라는 새로운 존재를 확인하게 하고 그 세대에 정체성을 부여한, 말 그대로 신세대 대표자였다. 1992년 봄 랩을 읖조리고 격렬한 춤을 추는 서태지와아이들이 등장했을 때, 신세대는 그들이 내놓은 파격적인 새로움에 열광했다. 서태지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신세대의 욕망을 터뜨린 뇌관이었다. 서태지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시대가 서태지를 만든 셈이다. “서태지와아이들은 신세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취향을 밖으로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했다.” 서태지와아이들을 분석한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겨레) <서태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문화과학사)를 쓴 이동연씨(문화 평론가)의 말이다.

데뷔하자마자 새로운 감각으로 젊은 대중을 사로잡은 서태지는, 이후 파격적인 음악 실험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그의 음악과 활동 방식은 특히 10대에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서태지는 기성 세대의 권위에 눌려 ‘찍소리 못하던’ 청소년들에게, 그 권위와 맞서 싸우는 일종의 영웅이었다. 입시 지옥에 갇힌 10대들에게 서태지의 외침은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청소년을 평가하는 기성 세대의 절대 불변 잣대(공부)를 서태지는 ‘됐어 됐어 이제 됐어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이젠 족해’(<교실이데아>)라고 야유·공격하는가 하면, 청소년에게 새로운 삶의 지침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대는 새로워야 한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도전하자’(<환상 속의 그대>).

<컴백홈>이라는 노래를 통해 가출한 청소년들을 위로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했는가 하면, 마지막 음반에 이르러서는 사전 검열 같은 사회 제도와 전면전을 벌이기도 했다. 통일 문제에 관심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서태지는 교사 노릇까지 했다. 지난 8월29일 김포공항에 서태지를 맞으러 나온 많은 팬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태지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구호를 외친 까닭은,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 때문이다.

서태지는 음악뿐 아니라 그 스스로가 사회 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맞서 싸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태지의 학력은 ‘고교 중퇴’이다. 지금은 자퇴라는 형식이 그리 낯설지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퇴자들은 자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양아치 취급을 받았다. 그 ‘양아치’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면서 기존 제도와 맞붙어 싸우고 방송까지 쥐고 흔드는 모습은, 1등 아닌 대다수의 낙오자에게 꿈이자 희망이었다.

서태지가 귀국한 이후 인터넷에는 그를 반기는 글이 무수히 올랐는데, 중학교 자퇴·가출 경험이 있는 어느 여대생은 반가워 눈물을 흘린 이유를 이렇게 소개했다. “<하여가>가 나왔을 때 나는 날라리 중딩(중학생)이었다. … 길에서 친구를 사귀던 (가출했던) 시절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을 닦고 컴백홈’이라는 그의 노래를 우연히 들었다. 순간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폭발했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됐다. 떨리는 손으로 공중 전화 버튼을 눌러 엄마와 통화하고 나서 얼마 후 난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서태지는 ‘단순히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신적 지주였고, 그의 노래 가사는 (삶의) 지침서였다.’ 지금 스무살이 되었다는 그녀는 “내 앞에 펼쳐진 광활한 시간의 무대에서 지치고 쓰러질 때 서태지의 노래를 떠올려야겠다. ‘실패해요, 쓰러지세요, 당신은 일어날 수가 있으니…’라는 가사를 말이다”라고 다짐했다.

4년7개월 만에 돌아온 서태지에게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팬들이 그처럼 열광하는 것은, 서태지가 그 세대의 의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보했기 때문이다. KBS에서 1980년대부터 대중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해온 박해선 PD는 “조용필의 팬은 ‘그냥 좋다’는 아날로그형 오빠부대였다. 반면 서태지와 팬의 관계는 그 시스템이 훨씬 더 정교하게 작동하고 그 증폭이 얼마나 커질지 모르는 디지털형이다”라고 말했다.

팝 칼럼니스트 임진모씨에 따르면, 구미 팝계에는 세대 의식을 드러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가수가 드물지 않다. 엘비스 프레슬리·봅 딜런·비틀스·마이클 잭슨과 1990년대 X세대 대표자 너바나가 그같은 인물들이다. “U2의 리더 보노는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를 만나 제3 세계의 부채를 탕감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서태지는 한국에서 그같은 사회성을 지닌 유일한 뮤지션이다”라고 임진모씨는 말했다. 음악가로서 새로운 경향을 창조하고 그것이 전반적인 대중 문화와 맞물려 대단한 파괴력을 지녔던 까닭에, 성인이 된 서태지 팬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가 그를 주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이다.

서태지가 오빠부대의 우상을 넘어 사회성을 지닌 대중 음악가라는 사실은, 그가 은퇴한 후 발족한 서태지와아이들기념사업회(서기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서태지와아이들의 정신을 기리고 기념하는 단체이지 팬클럽이 아니라고 밝히는 서기회는, 그동안 청소년 문화운동을 펼치는 시민단체(NGO)로 활동해 왔다.
서태지가 컴백하는 과정에서 서기회가 해낸 역할 가운데 하나는, 김포공항 입국장 질서 유지였다. 서기회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수준 높은 질서 의식’을 보여 달라고 끊임없이 당부했으며, 당일에는 20대 후반인 전·현직 서기회 회장단이 환영객의 맨 앞에 앉아 ‘우리는 태지팬, 앉아서 보자’라며 청소년 팬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서기회의 한 관계자는 “서태지와아이들기념사업회는 서태지기념사업회가 아니다. 서태지씨가 컴백해서 반갑고 잘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를 따라다니며 응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12쪽 관련 기사 참조).

음반 판매량으로 보자면 서태지와아이들을 압도한 슈퍼스타가 여럿 등장했지만, 서태지는 그만이 지닌 상징성 때문에 5년 가까운 공백에도 불구하고 올 가을을 달구는 가장 뜨거운 뉴스 메이커로 떠올랐다. 이동연씨는 “서태지는 부르디외가 말하는 일종의 상징 자본이다. 사회성·대중성·세대성을 결합한 서태지 같은 문화 아이콘을 한국에서 당분간 보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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