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청소년은 정말 ''보호'' 대상인가
  • 이성욱(문학 평론가) ()
  • 승인 2000.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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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를 둘러 싼 논란을 놓고 텔레비전에서 토론회가 벌어졌다. 출연자 중의 한 사람인 어떤 변호사의 웅변은 이런 것 같았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 보호이다. 그러므로 청소년 보호를 위해서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 제한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통념상 예의 변호사의 논리는 누구도 부인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진실과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통념의 경계 밖으로 살짝만 나가도 이 논리가 청소년 보호에 대해서도,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도 아주 왜곡된 관점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게 된다. 오늘은 청소년 문제만 이야기하자. ‘청소년(미성년자)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이미 성역이 되었다. 하지만 불순하게도 우리는 그 성역에 이렇게 물어본다. 청소년은 과연 ‘보호’의 대상인가?


청소년은 반편짜리 인간?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에는 먼저 청소년은 온전한 주체가 아니라는, 달리 말해 반편짜리 인간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성인은 그 반편이 온편이 될 때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격은 인간에게만 주어진다. 아직 인격체가 아닌 인간에게 인권이 있을 리 없다. 당연히 청소년은 인권의 주체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호의 주체와 보호의 객체 사이는 평등한 인간 관계가 아니라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공존된다.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청소년은 관찰의 대상이 된다. 한데 이 관찰은 말이 좋아 관찰이지 감시와 진배없다. 보호가 감시의 유사어가 되기는 십상이다. 감시는 항상 피감시자를 전제한다. 그 전제는 언제나 감시자는 피감시자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정당화한다. 감시자와 피감시자 관계가 권력 관계로 바뀌는 순간이다.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권력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간수와 수인의 관계이다. 간수는, 수인에게는 위법 행동의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그것을 예방하거나 처벌하는 데에 간수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럴 경우 수인의 위법 행동에 대한 예방과 처벌의 권리 주체라는 점에서 그는 이미 수인에게 막강한 권력자가 된다. 진지하게 물어보건대, 청소년에 대한 보호 논리가 혹여 청소년을 문제 발생의 상존 지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닌지. 예비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은 아닌지. 그럴 경우 청소년 자체가 ‘레드 존’이 된다.

나는 예의 변호사나 그외 분들의 충정, 다시 말해 청소년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거들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추호도 반대할 뜻이 없다. 하지만 내가 혹은 우리 세대가 청소년 시절이었을 때도 청소년의 보호 명제는 언제나 참이었다. 그리고 사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일이야’. 그러나 그 말의 배후에는 언제나 청소년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라는 명제가 은닉되어 있었다.

양보하여 보호라는 말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함축하는 내용과 방법은 지금과 달라야 한다. 때문에 청소년을 온전한 인격체로 보기보다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나아가 예비 범죄자로 보는 태도(보호론자는 당연히 스스로를 그런 관점의 소유자라고 인정하지 않지만)는 옳지 않다. 오히려 그런 보호 논리는 청소년의 건강한 인격과 인간적 기품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기에 ‘청소년보호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논지를 좁혀 음란물과 청소년 보호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음란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한다고? 맹세코 말하지만, 음란물에 대한 청소년의 접근은 절대 봉쇄하지 못한다. 인터넷 자본주의는 포르노 산업을 거대한 해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청소년기의 왕성한 호기심은 강력 엔진이 되어 그 포르노의 바다를 시속 80노트로 달린다. 40노트짜리 감시선으로 그것을 나포하려는 일은 허황된 짓이다. 물론 방법은 있다. 그런 인터넷 기술을 가능케 한 현대의 모든 디지털 기술을 폐기처분하면 된다. 그리고 그 기술을 유포한 빌 게이츠를 청소년보호법 위반 혐의로 징역 살리면 된다. 그럼 ‘너는 청소년 보호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그럼 ‘너는 그런 음란물을 딸과 함께 볼 수 있느냐’고? 그에 대한 답은 다음 번 문화 비평에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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