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먹히고 고구려마저 뺏기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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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구려사 편입 의도 노골화…국내 학계 대응 논리 개발 시급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의도가 현실화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국의 한 일간지가 얼마 전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기사를 싣자 국내 역사학계는 초긴장하고 있다.

12월2일 한국고대사학회를 비롯한 17개 학회가 함께 모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를 결성한 데 이어, 12월9일에는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2004년 3월에는 북한 지역의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도 열 예정이다.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도 12월17일과 23일 연이어 심포지엄을 열고 중국을 성토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를 짚어보았다.

중국측 주장의 핵심은 무엇인가?:중국이 내세우는 논리는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고구려가 중국 땅에서 태동했으며, 고구려인 상당수가 예맥족·말갈족 등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가 대대로 중국의 중앙 정권에 조공을 바쳤고, 책봉을 받았다는 점을 든다. 따라서 고구려와 수·당의 70여 년에 걸친 전쟁은 국제전이 아닌 내전이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고구려가 망한 뒤 유민 대부분이 발해나 돌궐을 거쳐 중국으로 융화했고 일부만이 신라로 귀속했다면서, 이 또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음을 나타내는 사례라고 주장한다.

국내 학자들은 어떻게 반박할까?:박경철 교수(강남대 교양학부)는 “고구려는 서기 4세기 말 이후 왕국 단계를 넘어서 제국적 지배 구조에 입각한 다종족 국가로 웅비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국제전이었다는 것이다. ‘조공-책봉’을 보는 시각도 다르다. 고대사 연구자인 임기환씨(한신대 학술원)는 “조공-책봉 관계는 당시 중국의 중앙 정권과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일반적인 외교 형식이었다”라면서, 이를 근거로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위지> 동이전이나 <송사> <명사> 등 중국 사서들도 고구려를 중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로 기록했다.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배경은 무엇일까?:중국 사회과학원 직속 기관인 변강사지연구중심은 2002년 2월부터 5년 예정으로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동북공정)’이라는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중국 동북 지방의 역사·지리·민족 문제 등을 다루는 학제 연구 프로젝트다. 그런데 동북공정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배경이 깔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중국은 1980년대 개혁 개방과 함께 소수민족 정책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들이 중국 동북지역을 드나들고, 민족주의적 주장들이 노출되면서 중국 당국은 긴장했다. 중국에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 등장하고,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중국이 국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한국 국회에 ‘재중 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특별법’이 상정되면서부터다. 그리고 2001년 북한이 평양 등지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자 동북공정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최광식 교수(고려대·국사학)는 “중국의 움직임은 신중화주의에 입각한 소수민족 정책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현재의 정치 상황을 잣대로 과거 역사를 재단하려는 것과 같다”라고 비판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수준은?:1980년대 이후 중국에서 출간된 동북 지역 역사와 지리에 관한 책은 모두 2백여 권, 논문은 수천 편에 이른다. 2003년 동북공정의 15대 연구 과제 중에는 ‘조선반도 민족·국가의 기원과 발전’ ‘말갈·발해와 동북 지방 각국의 관계’ ‘고구려의 족원과 강역’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아직까지 중국의 교과서에는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기술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동북공정의 결과에 따라 교과서 내용이 바뀔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럴 경우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보다 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현재 시급한 현안은?:북한은 2001년 북한 지역의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했지만, 중국측의 이의 제기로 보류되었다. 중국도 2003년 2월 국내성 등 중국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유네스코는 2004년 7월 중국 쑤저우에서 열리는 제27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두 나라가 신청한 고구려 유적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릴 계획이다.

현재까지 같은 유적을 두 나라가 동시에 등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한쪽만 등재될 경우, 유적의 규모나 정비 상태가 더 나은 중국쪽 유적이 고구려 유물로 공식 등재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학계의 우려다. 이럴 경우 중국의 의도대로 ‘고구려사=중국사’로 세계에 알려질 수밖에 없다. 국내 학계는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세우고, 남북 공조를 통해 북한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내의 대응에 문제는 없나?:고구려사가 한국사임은 분명하지만, 중국사의 일부라는 중국측 주장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고구려 영토의 4분의 3 이상이 현재의 만주 지역에 걸쳐 있었고, 고구려는 이 지역에서 첫 번째로 등장한 강력한 왕국이었다. 따라서 요(거란)·금·청 등 만주에서 출발한 대부분의 왕조는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청했다. 한족은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선 뒤에야 처음으로 만주 지역을 통치할 수 있었다.

중국은 만주를 차지한 후 첫 단계로 그 지역의 소수민족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는 작업에 나섰다. 발해가 중국사에 편입된 것도 이때였다. 그 뒤 1960년대 초반부터는 고조선도 중국사의 일부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요동 고조선설’을 주장하면서부터다. 이처럼 중국은 동북 지역 역사 연구를 철저히 정치적으로 접근했다. 1990년대 이후의 고구려사 연구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만주 지역 고대사 연구가 50여 년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된 반면, 국내의 고구려사 연구 실태는 너무 열악하다. 신라 연구자는 수백명, 백제 연구자도 100명이 훨씬 넘는다. 하지만 고구려 연구자는 겨우 20여 명밖에 안된다. 그 중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13명, 대학에 전임 교수로 자리 잡은 사람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중국을 규탄하는 목소리만 높고 내용은 별로 없는 것이 현재 형국이다. 고구려사 연구자인 전호태 교수(울산대)는 “이번 기회에 고구려사 연구의 저변을 강화하고, 동아시아 각국이 고대사 연구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한 공동 연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반짝 매스컴을 타다가 조용해질까 봐 걱정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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