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선 비디오] 설 연휴에 볼 만한 걸작들
  • 김의찬 (영화 평론가) ()
  • 승인 2000.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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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휴에는 어떤 영화를 볼까? 최근 국내 비디오 시장에는 숨겨진 수작이 많다. 거장 감독의 영화에서부터 성인 애니메이션까지 즐길 만한 품목이 다양하다. 일본 영화까지 출시되고 있어 마음만 먹고 찾아본다면 길다란 영화 목록이 작성된다. 명절을 맞이해 가족 드라마가 추가된다면 금상첨화일 듯.


극장에서 볼수 없었던 보석 같은 명화들

소리 소문 없이 비디오 가게를 찾은 영화들이 있다. 특히, 예술 영화로 분류되는 거장 감독들의 영화는 시장성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비디오로 바로 출시되기 일쑤이다. 최근 들어 그런 현상은 더욱 잦아지고 있는 추세다. 혹시 지루한 영화일지 모른다는 속단은 금물이다. 이런 영화들을 찬찬히 보다 보면 명절 연휴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비결이 보이기도 한다.

거장 감독의 숨은 걸작 중 한편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비밀의 꽃>(우일)이다. 알모도바르는 <하이힐>과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 등 좌충우돌형 블랙 코미디를 많이 만든 스페인 출신 감독.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기점으로 확실한 거장급 연출자로 공인받았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만들기 전에 제작한 <비밀의 꽃>은 감독의 숨겨진 걸작 중 한 편이다. 이 영화는 여성의 자기모순 그리고 상처받은 여성들의 잔잔한 연대를 그려낸다. 연애 소설을 쓰는 여주인공 레오는 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남편에게 버림받는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카사블랑카>에서 <아파트>까지 할리우드 영화를 인물들의 대사로 재치있게 활용한 <비밀의 꽃>은 알모도바르 감독이 바야흐로 대가의 위치에 등극했음을 알린다. 배우로 더 많이 알려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 감독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용서받지 못한 자> 같은 그의 영화는 걸작의 목록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작이다. 국내에는 <미드나잇 가든> (워너)이 출시되어 있다. <미드나잇 가든>은 미국 남부 지역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주인공 존이 지역 유지가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는 줄거리. 이 마을에는 개줄만 끌고 다니면서 개를 산책시킨다고 우기는 사람,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주술사 등 희한한 사람이 많다. 존은 이들과 만나면서 기묘한 체험을 한다. 살인이라는 극한 소재가 사용되고 있는데도 <미드나잇 가든>은 느슨한 드라마다. 이미 전작에서도 확인되었던 것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고독하게 응시하는 시선으로 미국 사회의 이면을 샅샅이 훑는다. 이 영화를 보노라면 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현존하는 감독 중 가장 고전적인 작가로 추앙되는지 이해된다.

혹시 <택시 드라이버>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지? <택시 드라이버>의 각본가이자 영화 감독으로 유명한 폴 슈레이더의 <어플릭션>(SKC)도 놓치면 아쉬울 수작이다.

이 영화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콩가루’ 집안이 등장한다. <어플릭션>은 줄곧 종교적 성찰의 영역에서 폴 슈레이더의 이력을 새삼 확인시킨다. <어플릭션>에서 지역 경찰로 일하는 웨이드는 우연한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가족 내부의 분쟁에 내내 시달린다. 어려서부터 폭력으로 일관했던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추운 겨울에 동사하도록 방치한다. 그리고 웨이드는 점차 아버지와 내면적으로 일체화하면서 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적인 남성상에 주목하는 <어플릭션>은 현대 미국 사회의 정신적 공허를 고발하는 수작이다.

좀더 따스한 영화도 있다. <림보>(컬럼비아)는 가족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드라마. 영화를 만든 존 세일즈 감독은 <론스타>와 <메이트원> 같은 영화들로 미국 인디 영화계의 유망주로 부각된 인물이다. 알래스카에 고립된 어느 일행을 통해 이 영화는 위기감을 조성하는 대신 깊은 서정성을 이끌어낸다. 과연 이들은 ‘연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뒤 한번쯤 생각해 보시기를. <림보>의 마지막은 머리 속에서 쉽게 털어내지 못할 장면이다. 지난해 칸 영화제 출품작이다.

얼마 전 타계한 큐브릭 감독의 <스탠리 큐브릭의 메탈 자켓>(워너) 역시 수작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 몇 년 전 국내에서 개봉했지만 비디오로 출시된 것은 최근 일이다. 베트남 전쟁의 극한 상황이 펼쳐지는 이 영화에서 큐브릭 감독은 음악과 영상의 조화 그리고 지옥 같은 현실에 처한 젊은이들을 빼어난 화면으로 담아냈다. 성장과 가족의 의미 되새기는 따뜻한 소품들

명절에는 역시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기 마련.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싶다면 잔잔한 드라마를 만나는 것이 제격이다.

<원트루씽>(CIC)은 윌리엄 허트와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드라마. 병을 앓는 아내이자 어머니가 삶의 마지막 시간을 가족과 함께한다. 딸은 어머니의 태도와 사는 방식이 늘 못마땅하지만, 막상 어머니가 세상을 뜰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사랑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는다. 배우들 연기가 볼 만하며, 모녀 간의 따스한 감정 교류가 영화 전편에 걸쳐 저류를 형성하고 있다. 비슷하게 모녀 관계를 다룬 한국 영화 <마요네즈>와 비교하면 흥미로울 법하다.

이안 감독이 만든 <아이스 스톰>(DMV)은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로 관객을 초대한다. 1970년대의 미국,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는 미국인들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남편과 아내는 각기 불륜을 저지르고, 자녀들 역시 방탕과 무질서한 삶에서 허우적댄다. 탈출구가 있을까? 역설적으로, <아이스 스톰>은 이 어둠에 잠긴 가족이 우연한 사건을 통해 다시금 가정의 질서를 회복해 가는 풍경을 담는다. 시고니 웨버와 크리스티나 리치 같은 스타가 출연한다.

우정을 그린 드라마도 있다. 로렌스 캐스단 감독의 <멈포드>(브에나비스타)에서 ‘멈포드’라는 이름의 심리학자가 마을 주민과 교류한다. 사실 그는 학위도 없고 대학에서 정식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사기꾼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인생 상담을 받고 나름의 처방을 받은 뒤 행복해 한다.

로렌스 캐스단 감독은 이미 <우연한 방문객>과 <새로운 출발> 등으로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임을 증명한 바 있다. <멈포드>에서도 직접 시나리오를 썼는데, 감칠 맛 나면서 삶의 이면을 콕콕 쑤시는 대사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비록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것은 아니지만 <멈포드>는 한번쯤 시간을 내서 볼 만한 드라마다.

정통 드라마로 보기는 어렵지만,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브에나비스타) 역시 연휴 때 잊지 말고 챙겨볼 만한 영화다. 학교에서 왕따당하고 학업 성적도 처지는 맥스는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일삼는다. 게다가 나이도 한참 연상인 선생님을 짝사랑한다. 빌 머레이가 주연한 이 잔잔한 영화는 성장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소품이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일본 영화의 힘'

일본 영화는 변함없는 이슈이다. 최근 국내에서 공개된 일본 영화들은 흥행 성적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한 감이 있다. 하지만 <러브 레터>(연출 이와이 순지)라는 흥행작이 추가되면서 일본 영화의 저력을 다시 평가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그리고 이미 공개된 일본 영화 목록은 영화의 재미를 떠나, 일단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챙겨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아직 못본 영화가 있다면 말이다.

<우나기>(우일)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로 칸 영화제 수상작. 사실적 캐릭터의 힘이 상당하다.

<우나기>에서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야마시타는 엉겁결에 살인범이 된다. 8년 징역형을 마친 그는 이발사가 되어 우나기(뱀장어)를 기르면서 지낸다. 야마시타는 자신의 조수로 일하게 된 게이코라는 여성을 통해 인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다. <우나기>는 비록 상업성이 뛰어난 영화는 아니지만, 일본 영화의 대가 중 한 사람인 이마무라 쇼헤이의 대표작 반열에 올려놓을 만하다. 일본의 국민 배우로 꼽히는 야쿠쇼 코지 주연작이기도 하다.

<나라야마 부시코>(새롬) 역시 이마무라 감독의 영화다. 노인을 나라야마라는 산에 내다버리는 풍속이 있는 마을이 있다. 오린이라는 노파는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산에 오르려 한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산행으로 마음에 짐을 짊어진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성욕에 대한 감독의 냉철한 시선, 문명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접할 수 있는 영화다. 인간 내면의 들끓는 욕망덩어리를 은막에 날 것 그대로 뿌려놓기로 이름난 이마무라 감독의 역작이다.

‘수입 일본 영화 1호’ 품목이 되었던 <하나비> (우일)는 코미디언이자 영화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 감독작. 니시라는 형사가 병을 앓는 부인과 자살 여행을 떠나는 <하나비>는 동양적 감성이 물씬 묻어난다. 생략과 절제의 미를 추구하는 기타노 다케시 영상 세계의 집약판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니시 형사는 선악의 굴레를 훌쩍 뛰어넘는다. 형사의 본분을 잊고 범죄를 저지르며, 병든 아내를 간호하기보다 함께 삶을 마감하는 극한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죽음에 관해 명상하는 철학자인 기타노 감독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하나비>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직접 주연을 겸했다.

이밖에 <카게무샤>(폭스)는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가 연출한 작품. 오다 노부다가·도쿠가와 이에야스·다케다 신겐 같은 영주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16세기가 배경이다. 죽음에 직면한 다케다 신겐은 “나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영주의 자리를 대신하는 카게무샤, 즉 그림자 무사가 그의 자리를 채운다. 외모가 죽은 영주와 똑같은 사람인 것이다. <카게무샤>는 구로사와 감독의 전작인 <7인의 사무라이>와 <라쇼몽>에 미치지 못하지만, 감독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스펙터클한 면모를 과시한다. 한때 슬럼프에 빠졌던 구로사와 감독이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 후배 감독들의 도움으로 제작할 수 있었던 영화다.
풍자ㆍ유머 푸짐한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근래에는 성인층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많아졌다. <누들 누드>가 성공한 데 힘입어 이같은 현상은 비단 국내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해외 애니메이션 역시 비슷한 양상이다. 왜일까? 아마도 만화 영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질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성인이 만화 영화를 보면서 웃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DMV)는 미국 성인 애니메이션의 대가로 잘 알려진 빌 플림톤의 작품. 제목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다. 빌 플림톤의 성적 상상력이 자유롭게 펼쳐지고 있으며, 때로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내기도 한다. <심슨 가족>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비주류 애니메이션의 실험성을 드러낸다. <정치야 맛좀 볼텨>(시네마트)는 시사 만화가로 유명한 박재동 화백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모음. 주로 정치적 사안에 관한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를 맛볼 수 있다. 패러디 기법을 주로 응용한 각 작품들은 박재동 화백의 기발한 어법과 그림으로 채색되어 있다.

근래에 가장 화제가 된 성인 애니메이션은 <사우스파크>(워너). 원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과 게임으로 해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는 지난해 미국에서 개봉되었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소개되었는데, <사우스파크>의 매력을 듬뿍 맛볼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욕설이 많이 나오기로 악명이 높다. 초등학생 캐릭터가 나오지만 아이들 대사의 절반 정도는 욕이다. <사우스파크>에서 아이들은 영화를 보고 저질스런 언행과 욕설을 배워 학교에서 흉내내곤 하는데, 이에 놀란 학부모들은 모든 것을 영화 탓으로 돌린다. 영화가 캐나다에서 제작되어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이 애니메이션은 성과 폭력보다 자극적인 대사들로 성인의 취향을 만족시킨다. 게다가 귀여운 꼬마 캐릭터들이 등장하니 볼거리도 푸짐하다. 워낙 욕설의 강도가 드센 탓에 국내에서 출시된 비디오에는 다소 ‘순화된’ 언어로 자막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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