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상]부활하는‘다원 사회’ 고려 왕조
  • 朴晟濬 기자. ()
  • 승인 2000.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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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개방성·역동성 등 ‘숨 은 유산’ 풍부… “21세기 대안이다” 재해석 바람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인 1997년 1월 대우재단에서 한국역사연구회 주최로 대중적인 학술 강연회 하나가 열렸다. 강연 주제는 당시로서는 다소 낯선 ‘또 하나의 전통, 고려’. 중세사를 공부해온 학자들이 일반인을 상대로 자기네 연구 성과를 알기 쉽게 풀이해 주는 자리였다. 당초 이 강연회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역사학자들은 청중의 예상 밖 호응에 깜짝 놀랐다.

그 직후, 시중 대형 서점 한 귀퉁이에는 역사 대중화의 물결을 타고 쏟아져 나온 각종 역사학 관련 서적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고려사와 관련된 또 한 권의 교양서가 등장했다. 앞서 강연회를 주도했던 한국역사연구회의 중세사연구반 소속 전문 연구자 38명이 1995년부터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고려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전2권·청년사)이다. 책 제목이 알려주듯이 고려 시대를 생활사 중심으로 서술한 이 책은 이미 지난해 말 이 분야에서는 보기 드물게 인쇄 횟수 ‘10쇄’(1권의 경우)를 돌파하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잊혔던 왕조’ 고려가 부활하고 있다. 공중파 방송이 고려를 건국한 왕 건을 주인공으로 한 대형 특집물과 대하 드라마를 제작하는가 하면, 서점가에서는 고려 시대를 다룬 교양 서적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역사학계의 고려사 연구도 활기를 더해 가고 있어, 최근에는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려 수도 개성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개경 연구반’까지 탄생했을 정도이다(95쪽 상자 기사 참조).

고려 왕조는 918년 태조(太祖) 왕 건에 의해 개국해 1392년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무너지기까지 무려 4백75년 동안 지속했던, 우리 역사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왕조이다. 그런데도 고려 왕조가 삼국 시대나 조선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진 데에는 몇 가지 복잡한 요인이 깔려 있다.

첫째는 분단의 장벽. 고려 시대의 주요 유물·유적은 대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일대에 몰려 있어 현실적으로 접근하기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료 빈곤이다. 고려사에 대한 기본 사료로는 〈고려사〉(1451년) 〈고려사절요〉(1452년)가 있으나, 이는 조선 시대에 일종의 ‘관제 사가’들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고려 역사를 일정하게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고려사 연구가 상대적으로 침체했던 이유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한국 역사학 연구 분위기의 특수성과 관련되어 있다. 일제가 뿌려 놓은 이른바 ‘식민 사학’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이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 역사학계의 최대 과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일제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대사의 경우에는 ‘타율성론’으로, 조선 왕조사의 경우에는 ‘정체성론’으로 역사적 실재를 집중 왜곡했다. 자연히 광복 이후 선배 역사 학자들은 고대사와 조선 왕조사를 중심으로 식민 사학에 맞서는 이른바 ‘반식민 사학’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박종기 교수(국민대)는 말한다.
고려 사회를 설명하는 새로운 틀 ‘벌집 구조론’

하지만 소장 학자들 사이에서 식민 사학도 반식민 사학도 아닌 이른바 ‘제3의 역사학’이 소리 높이 외쳐지는 요즘 들어 상황은 일변했다. 이제 더 이상 일제가 파놓은 역사의 함정, 즉 ‘자주냐 사대냐’ 하는 단선적인 역사 인식의 굴레에 갇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배경에서 유력한 대안의 하나로 검토된 것이 바로 고려사이다. 조선 왕조 못지 않게 장수를 누린 왕조의 지속성, 그러면서도 오늘날 ‘자랑스런 문화 유산’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각종 유물·유적을 후대에 물려준 문화 저력에서 역사학자들은 ‘현실의 역사’에 개입할 수 있는 고려사의 가능성을 내다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려 시대 또는 고려 왕조의 전체상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고려 왕조의 성격을 규정할 때에는 ‘귀족 사회’ ‘불교 왕국’ 따위 개념이 주로 동원되어 왔다. 또 몽골 침입(1231년) 이후 장기간에 걸친 원나라 간섭기에서 유일하게 강조되었던 것은 삼별초군으로 대표되는 ‘항몽 투쟁’이었다. 아울러 원나라에 의한 간접 통치가 이루어지던 고려 말기는 조선 초기 역사가들에 의해 부정적인 사실만 부각되는 방식으로 집중적으로 왜곡되었다.

그러나 고려 사회에 대한 이같은 통념은 최근 연구 성과를 활발하게 내놓고 있는 신진 연구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지난해 말 펴낸 〈5백년 고려사〉(푸른 역사)를 통해 이른바 ‘벌집 구조론’이라는 독창적인 해석 틀로 고려 사회를 설명하려고 시도한 박종기교수이다.

박교수의 ‘고려사 읽기’ 특징은, 고려사를 조선사처럼 같은 중세사에 포함하면서도 다른 사회였음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고려 사회를 형성하는 주요 원리와, 그 변화 과정을 해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같은 작업 끝에 그가 개념화한 것이 바로 ‘벌집 구조론’이다.

벌집 구조론이란 쉽게 말해 고려 사회가 수많은 군소 단위로 쪼개져 있었으면서도 벌집처럼 밀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이다. 벌집 구조론에 따르면, 고려 사회는 이같은 사회 구조 덕분에 성리학적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단일 원리로 운영된 조선 사회(박교수는 이를 ‘동심원 구조’라고 부른다)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갖게 된다. ‘중세의 특질을 조선 시대와 공유하면서도 다양성·역동성·개방성 면에서는 조선 사회를 훨씬 더 앞지르는 사회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고려 사회가 이름 난 불교 왕국인데도, 불교는 물론 도참설·풍수지리·유교 윤리 등 다양한 종교·사상이 용인되고 지속된 데에서 다양성의 증거를 찾았다. 아울러 박교수는 1170년 무인 정권 등장과, 이후의 대규모 농민 항쟁에서 고려 사회의 역동성을 보고, 송·원·거란·여진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 상인과도 무역을 번창시켰던 경험에서 고려 사회의 개방성을 확인했다. “고려를 귀족 사회가 아닌 다원 사회라고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라고 박교수는 말한다.
겉으로는 ‘제후국’, 속으로는 ‘황제국’

조선 왕조 5백년 역사만을 ‘시간의 경험’ 단위로 삼을 경우, 한국의 역사는 대대로 중국에 종속적이었다고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기왕에 나온 고려사 연구 성과는 ‘시간의 경험’ 단위를 넓힐 경우, 적어도 고려 왕조 때까지만 해도 우리 역사가 결코 중국에 종속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록 몽골 침입 이후 수십 년간 고려 왕조가 원나라의 속국 또는 신하국 지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전까지는 최소한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황제국’으로 행세했다는 것이다.

천자(天子), 즉 중국의 황제만이 행할 수 있는 ‘하늘 제사’를 고려 왕조가 ‘원구단’까지 세워 공공연하게 지냈다는 사실은 대표적이다. 고려 왕조는 왕실 관계 용어나 복장·의식 따위는 물론 중앙 관제 따위도 중국의 황제와 대등하게 사용했다. 황제가 자신을 부르는 특수 용어인 ‘짐(朕)’을 공식으로 사용하거나, 중앙 관제를 중국 당나라 제도와 마찬가지로 ‘3성 6부’로 운영한 것이 그 예이다. 일부 사료에는 고려 왕조가 중국을 제외한 다른 인접국과 외교할 때에도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사실을 증명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와 함께 백여 년에 이르는 원나라 간섭기(1274~1374년)도 역사학자들에 의해 재해석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시기는 조선 시대 당쟁사와 함께 한국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고려사 연구가들은 이 시기가 이성계의 조선 개국이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귀결되는 왕성한 개혁 시기였음을 강조한다. 충선왕·충숙왕·충목왕 때의 개혁 시도는 물론, 공민왕의 반원 개혁·신돈(辛旽)의 개혁 등 원나라 간섭기인 14세기는 오히려 신진 사대부층 등장이라는 ‘역사의 전진’을 재촉한 개혁 시대였다는 것이다.

‘역사학은 장기 전망으로 볼 때 정치학이 될 수밖에 없다’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역사학의 실천적인 의미를 강조한 이 말은 그동안 진행되어온 고려사 연구 경향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광복 이전 일제는 한국 사회의 후진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려사에도 예외 없이 왜곡의 칼을 들이댔는데, 대표적인 것이 사회 편제인 향(鄕)·소(所)·부곡(部曲)에 대한 성격 규정이다. 오늘날 소장 학자들에 의해 ‘양민 집단 사회’로 재해석되고 있는 향·소·부곡은 극히 최근까지도 일반에게 ‘천민 집단의 거주지’ 정도로 알려져 왔다. 이는 바로 일제가 한국 역사의 낙후성을 드러내기 위해 일삼았던 주장으로 향·소·부곡을 노예 상태에 가까운 ‘천민 집단’으로 볼 경우, 한국 역사가 고대에서 중세로 옮아가는 시간은 그만큼 더뎌지는 것이다.

북한 학계는 또 다른 ‘의도’에서 고려사 연구를 진척시켜 왔다. 이른바 ‘주체 사관’에 입각해 고려 시대 대외 항쟁사를 유난히 도드라지게 한다든지, 후삼국 시대를 종결짓고 통일 왕조의 위업을 이룩한 고려 태조 왕 건을 치켜세우는 일 따위가 그것이다. 실제로 김일성은 죽기 직전인 1992년 5월 개성 송악산 서쪽 기슭에 복원한 왕 건 왕릉을 찾아 직접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학계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 학계는 고려 시대를 ‘봉건 시대 계급 투쟁이 절정에 이른 시기’로서 중세사의 큰 발전기라고 파악해 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최근 국내의 소장 학자들, 특히 ‘진보’를 표방하는 학자들은 또 다른 실천적인 의미에서 고려사에 지극한 관심을 쏟고 있다. 고려 사회가 갖고 있는 다양성·역동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삼국 시대의 분열상을 극복하고 실질적인 사회 통합을 이룩한 개국 초기의 고려 역사에서 21세기 최대 과제인 지역 통합은 물론 남북 통일을 위한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다양성·통일성과 대외 개방성이다. 고려 사회는 다양성·통일성은 물론 하층민이나 외국인도 관리가 될 수 있도록 용인한 열린 사회였다. 바로 이 점이 21세기를 맞는 우리가 고려사를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이유다”라고 박종기 교수는 말한다.

청자·팔만대장경·금속 활자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고려 시대의 유산이라고 한다면, 다양하면서도 통일을 추구한 고려 사회의 경험은 오늘날의 현실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역사의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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