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전 <영화 예술> 발행인 이영일씨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0.03.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 <영화 예술> 발행인 이영일씨/올곧은 비평 정신으로 영화사 연구 초석 다져
한국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기억 상실증’ 만큼 요즘 상황을 잘 설명하는 용어는 드물다. 조금만 거슬러올라가도 길이 뚝뚝 끊기기 일쑤다. 이런 와중에 젊은 연구자들이 ‘거의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다’고 말하는 인물이 있다. 전 <영화 예술> 발행인 이영일씨(68)다.

월간 <영화 예술>은, 1959년 창간된 후 휴간과 복간을 세 차례나 거듭하며 1997년 2월까지 발간되었던 영화 전문지다. 이씨는 얼마 전 반가운 선물 하나를 받아 들었다. 기자로 일했던 후배 안세철씨가 영인본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4월 완간). 이씨는 “일할 때 월급도 제대로 못줬을 텐데…”라며 말 끝을 흐렸다.

연구자들에게 이씨가 각별히 고마운 것은, 그가 지면을 통해 당대의 흔적을 모아 놓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소영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따르면, 이씨는 그저 눈 밝은 편집자가 아니었다. 김교수는 그를 ‘당대의 영화 비평가이며 영화사가’로 높이 평가하면서, 최근 저서 <근대성의 유령들-판타스틱 한국 영화>에서 김기영 감독에 대한 그의 평가(‘마성(魔性)’의 미학)를 여러 차례 인용하고 있다. 매체로는 처음 이씨를 인터뷰한 영상문화저널 <易/트랜스>(창간호)는 그와 만나던 날의 모습을 ‘오래도록 발견되고 계승되기를 기다려왔던 한국 영화사가, 1990년대로부터의 호출에 응답해 두터운 먼지를 털고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근년의 풍경을 집약하는 듯하다’라고 묘사했다(대담자 김소희).


“요즘 영화 글, 사교야? 평론이야?”

한국 영화사를 더듬는 손끝에, 맨 먼저 그가 와닿은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호출은 뒤늦은 감이 있다. 이씨는 <영화 예술> 제작비를 벌기 위해 쉴 새 없이 써야 했던 원고(그의 시나리오는 영화화한 것 만해도 30편이 넘는다) 때문인지 1980년대 중반부터 한쪽 눈이 멀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병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했으며 무엇보다 하는 말이 말랑하지 않았다. 요즘 평론을 보고 ‘사교를 하려는 것인지 평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일갈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7~8년 전 퇴원하는 그를 보고 의사가 ‘조심하면 1년은 살 수 있다’고 했단다. 그는 여전히 짱짱하다.

근력이 짱짱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도무지 모호하고 느끼한 말을 참지 못하는 듯했다.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 은행에 들렀을 때였다. 직원들이 띠를 두르고 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다. ‘크게 모십니다.’ 울컥 기분이 상한 그는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크게 모신다는 게 무슨 뜻이오? 고객은 친절하게 대하면 되는 것 아니오?”

영상원에서 한국 영화사를 전공하고 있는 김소희씨에 따르면, 기억상실증은 1970년대 이후 한국 영화가 자초한 일이다. ‘호스티스 영화’에 기대어 연명하던 한국 영화의 빈곤함이, 동시대 이전의 작품을 ‘나쁜 영화’로 기억하도록 만들었고, 곧 기억 상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 한국 영화가 달랐다는 것은 상식이다.

<영화 예술>은, 영화가 대중과 평자의 사랑을 두루 받았던 풍요한 시절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토론 주제나 발제문을 미리 제공한 뒤, 평론가로 하여금 토론을 벌이도록 한 ‘지상 심포지엄’은, 쟁점을 선도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통해 해외 이론을 소개하고, 한국 영화가 서 있는 지점을 짚어보곤 했던 것이다. 일반 독자에 대한 서비스도 빼놓지 않았다. 신작 소개와 촌철 살인의 연기 품평, 국내외 시나리오를 엄선해 싣는 것이 그 예다. ‘이 달의 배우 채점표’는 재치가 넘친다. ‘풍만하고 요염하나 어쩐지 불안. 오버 액션을 하는 데 특징이 있지만, 정작 매력은 그걸 안 하는 데 있는 배우’(도금봉). ‘소질은 있는데, 이날까지 연기 개성을 못찾은 배우의 하나’(남궁원).

이장호 감독은, ‘<영화 예술>에 실린 시나리오를 보며 갈증을 달랬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영화·철학에 두루 관심이 있었던 그가, 영화 전문가가 된 데는 우연이 컸다. 스물 여섯에 평화신문사에 스카우트된 것이다. 당시 그는 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신문에 평론을 기고하던 문학 청년이었다. <현대 예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으나, 고작 3호를 내고 끝났다. 그를 계기로 영화 저널에 눈을 떴고 영화예술사를 차려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잡지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일하면서 그는 30년 동안 시나리오와 저술, 잡지 발간에 몸을 바쳤다. 한창 때는 대학의 부름도 마다했다. 하지만 <영화개론> <한국영화전사> <한국영화주조사> <평전 한국 영화인 열전> 등 방대한 자료에 기반을 둔 저서들로 인해 그는, 한국 영화 연구자에게 눈을 부릅뜬 수문장으로 비쳤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출판 시장은 척박하다. 창간호부터 꼬박꼬박 모았다는 독자의 격려 편지나, 정기 구독을 하겠다는 외국 대학의 구독 신청을 받을 때면, 그간의 고생이 눈녹듯 했다. 지인들이 가끔 영화 광고를 실어주기도 했지만, 수지가 맞을 리 없었다. 1959년 발간했다가 4·19 때 휴간, 1965년 재창간했으나 유신 이후 다시 ‘페이드 아웃’. 행정적인 정간 조처보다, 그로 인해 출판계가 얼어붙는 것이 더 문제였다. 다른 곳에서 전문지를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한두 호 낸 뒤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가 보기에 전문지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곳은 한국과 대만 정도. 잡지 천국인 일본에서도 최근 영화 전문지 몇 개가 쓰러지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처럼 척박한 곳은 드물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김기영 감독 재발견에 큰 몫

그는 남에게 광장을 제공하는 데 머물렀다고 말하지만, 스스로 비평가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시작(詩作)과 문학 평론으로 다져진 그의 글은, 국적 불명의 글이 판치는 요즘의 영화 평문과 비교할 때 이채롭기까지 하다. 주변 정보가, 정작 진짜 이야기를 대체하는 상황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삶과 글에서 엄정함을 잃지 않으려 했던 태도 덕에 후학들이 그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1990년대 들어 김기영 감독이 컬트 감독으로 부활한 것이 대표적이다. 젊은 관객이 김기영을 ‘발견’한 것은 1997년 부산영화제 회고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 이영일씨는 1960년대에 자신이 썼던 평문을 기초로 김감독을 소개했다. 계보에 쉽게 편입되기 어려운, 뚝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인 김기영 감독이 1990년대 중반 재발견되는 데 그의 몫이 작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그의 영화에 대한 단평은 ‘괴기 취미,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고작이었다. 이씨는 달랐다. 작품을 보고 단박 ‘마성(魔性)의 미학’이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 무엇이 김기영을 키웠는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김감독은 그리스 비극과 북유럽 문학에 젖줄을 대고 있으며, 성품도 세속의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스타 감독과 달리 언론과도 친하지 않았으며, 의복도 소탈했다. “하지만, 그는 진짜 커피 맛을 알았다. 그 사람 덕에 명동 뒤편 커피 재료점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찬사’로 해석되기 십상인 리얼리즘을 놓고, 그 성과와 한계를 논하는 대목은 1960년대 논의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국 영화의 주류가 리얼리즘이라고 파악한 그는, 정면으로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리얼리즘은 최대한의 저항이었지만, 스스로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요즘 자신이 길고 긴 회상에 잠겨 있다고 말했다. 나른한 반추가 아니다. 자신이 살뜰히 다루지 못해 잊혔다싶은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쁘다. 30년대 방한준·박기채 감독과 그 뒷 세대인 이강천·하길종 감독 등이 그렇다. 그는 <한국영화전사> 개정판을 내기로 했고, 40년 만에 첫 평론집도 묶어낼 계획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