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21세기 밝혀줄 화이트헤드 ‘과정 철학’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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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 철학’의 잠재력 주목…학회 중심으로 저술·연구 활발
20세기를 마감하고 새 천년을 준비중인 지성계, 그 중에서도 철학자들은 20세기를 어떻게 회고하고 있을까.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20세기를 ‘반형이상학의 시대였다’고 단언한다. 철학하는 사람은 많았으되 ‘전체’를 포괄하여 거대한 ‘철학 건축물’을 세우려는 노력은 적었던 반면, 전체를 ‘부분’으로 ‘해체’하거나 전체에 대한 담론을 아예 폐기 처분하고 대신‘부분, 그 자체’의 탐구에 지적 능력을 쏟아부으려는 노력이 일반적인 시대가 바로 20세기였다는 것이다.

대부분 과학의 이름을 빌려, 또는 과학의 위세에 눌려 철학이 부분으로 몰입하면서, 전체를 포괄하려는 노력은 많은 철학자에게서 무시되거나 버림받기 일쑤였다. 러셀·비트겐슈타인과 더불어 특히 영어권에서 ‘현대 철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1861~1947) 역시 이같은 20세기 철학 조류에 떠밀려 가치와 잠재력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 화이트헤드가 실존주의·구조주의·분석 철학 등 20세기 지성계를 이끌던 철학 사조들이 퇴조하는 것과 더불어 현상학·탈구조주의 등 세기말 사조가 위세를 떨치는 요즘, 그것도 본인이 활동했던 시간·공간 무대와는 한참 떨어진 한국에서 ‘화려한 개화’를 준비하고 있다.

독창적 우주론 펼친 ‘현대 철학의 거장’

이른바 ‘과정 철학’이라고 부르는 화이트헤드 철학은 ‘고정 불변하는 실재(reality)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철학적 개념(또는 안목)만으로 이해되는 우주는 진정한 우주가 아니다’라는 그 자신의 독특한 우주론을 요체로 한다.

과학적 진보가 눈부셨던 20세기에 주류 철학자들은 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인간 지식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저명한 수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이기도 했던 화이트헤드는 이같은 주류 철학에 맞서 ‘과학의 성과’까지 자신의 철학 체계에 끌어들여 새로운 우주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 ‘파악(prehension)’‘생성(becoming)’ ‘자기 초월체(superjection)’ 등 그의 저작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난해한 개념들이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같은 발명품을 동원해 ‘존재의 실상은 활동하는 동안에만 있고, 활동이 끝나면 소멸한다’는 ‘생성론’을 주장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고 63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활동한 화이트헤드는 일찍이 ‘철학에의 혁명’(존 듀이) ‘20세기의 데카르트’(허버트 리드)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도 그가 오랫동안 철학계의 음지에 있었던 까닭은 같은 영어권 철학자들에게마저 친숙하지 않았던 이같은 개념의 난해함, 즉 ‘난독(難讀)’때문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그러나 낯선 개념적 발명품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그의 우주론은 ‘전통 철학’과 결별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는 점에서 일부 학자들의 눈길을 끌어 왔다.

화이트헤드 철학이 지닌 또 하나의 강점은, 그의 철학이 이처럼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반면, 이론 구성 면에서 동양적 우주론의 논의 내용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다는 데 있다. 특히 신유학적 우주론의 주요 개념인 기(氣)와 이(理)는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주로 쓰이는 ‘현실적 계기’‘영원한 객체’와 동일한 문제 의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법조인·교사 등 포함, 연구자 50~60명

국내 학계에서 과정 철학의 잠재력에 주목해 일찌감치 화이트헤드 연구에 눈을 돌린 학자로는 ‘몸철학’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동원해 그 자신의 독창적 철학 구조물을 축조하고 있는 도올 김용옥이 대표적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사 최대의 반역자이자 21세기에 살아 남을 (아마도) 유일한 철학자인 동시에, 그의 철학은 그 자체로 커다란 통찰력덩어리’라고 주장한다. 김씨는 이미 80년대부터 그 자신의 저작이나 동료 철학자들의 저작에 들어가는 서문 또는 해제·해설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이같은 점을 되풀이 강조해 왔다.

김씨가 지식 대중의 전면에 나서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동안 학계 일각에서는 화이트헤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부단하게 진행되었다. 〈과학과 근대 세계〉(89년) 〈과정과 실재〉(91년) 〈관념의 모험〉(96년) 등 ‘화이트헤드 3부작’을 국내 처음 완역해내고 97년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 경험〉이라는 연구서까지 따로 상재한 오영환 연세대 명예 교수의 노력은 각별하다. 오교수는 말하자면 국내 학계의 화이트헤드 연구에 초석을 다지고, 실질 내용을 채워온 이 분야의 거장인 셈이다. 오교수는 또 97년 창립된 ‘한국 화이트헤드 학회’의 초대 회장도 맡아 정기적인 독회 모임과 학술대회를 이끌고 있다.

화이트헤드 입문서(또는 개설서)로는 최근 나온 문창옥 박사(연세대)의 〈화이트헤드 과정 철학의 이해〉가 비록 출발 단계이지만 부쩍 깊이를 더해 가고 있는 화이트헤드 연구 분위기를 일정하게 반영하는 성과물이다(위 상자 기사 참조).

현재 국내 화이트헤드 연구자 수는 학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50~6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에 띄는 점은, 학회 회원들의 인적 구성이 철학 연구자들 외에 목사·신학자·물리학자에서부터 법조인·초등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연구 수준이나 관심사도 다르지만 이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에서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무너뜨렸듯이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마저 무너뜨려 궁극적으로 인류 공통의 지적 도구로 기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이들은 바로 이같은 믿음에 의지해 ‘새 천년’으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를 부지런히 찾아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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