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한국생활사박물관>시리즈
  • 박성준 기자(snypeoo@e-sisa.co.kr) ()
  • 승인 2000.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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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기획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 15권/알찬 내용·정성 어린 도판 담아 2002년 ‘완공’
‘선사 생활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야외 전시장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서기 2000년의 서울 모습과 기원 전 4000~2000년의 서울 모습이 대비된다. 야외 전시장을 지나면 차례로 구석기실·신석기실·특별전시실이 나온다.

관람객은 구석기실에 들러 충북 청원군 두루봉 동굴 부근에서 벌어졌음직한 구석기인들의 쌍코뿔소(간빙기 때 출현했다가 멸종한 아열대성 코뿔소의 일종) 사냥 광경을 지켜볼 수 있다. 신석기실로 발길을 옮기면 그 시대 한반도 거주자들이 만들어 놓은 돌 괭이·작살·돌 추·돌 바늘 등 당대 ‘산업 기술’ 수준을 한눈에 보여주는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발굴 현장 가상 체험도 가능

특별전시실을 지나면 가상체험실과 특강실이 나온다. 가상체험실 한곳에는 1970년대 후반 이른바 ‘에슐리안 핸드엑스’(구석기 시대 주먹도끼의 일종)가 출토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경기도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를 본보기로 하여, 관람객들이 고고학 발굴 작업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발굴 현장을 재현해 놓았다. 특강실에서는 ‘모권 사회’ 존재 여부와, 원시 시대 구분법에 대한 특강이 한창이다. 마지막으로 ‘국제실’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전세계 선사 문화의 특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큼지막한 연대표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같은 전시실 구성 방식은 선사생활관과 함께 완공된 고조선생활관도 동일하다.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자 전시장 규모로도 유례가 없는 생활사 박물관 건립 공사가 한창이다. 시대 순에 따라 가장 먼저 착공한 선사생활관과 고조선생활관은 이미 문을 열어 방문객을 맞고 있다. 박물관 건립 공사는 오는 2002년 12월쯤 끝날 예정인데, 그 때가 되면 이 박물관은 고구려생활관·조선생활관·20세기생활관 등 모두 15개에 이르는 독립된 전시관을 갖게 된다.

이 박물관이 기존 박물관과 다른 점은 박물관 부지가 따로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인터넷 가상 공간의 박물관도 아니다. 이 박물관은 사계절이라는 출판사가 전체 ‘설계도’를 그리는 데 1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고, 1단계 공사에만 8개월 공을 들인 ‘책 속 박물관’이다. 정식 이름은 〈한국 생활사 박물관〉 시리즈이다.

비록 책 속의 박물관이지만 전시 수준은 웬만한 박물관을 뺨친다. 전시된 유물·유적은 국립중앙박물관·온양민속박물관 등 전국의 박물관·민속관을 뒤져 엄선한 것이다.

대형 기획을 진행해온 사계절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미 나온 책만 해도 권당(100쪽 안팎) 40여 컷의 그림과, 100여 컷의 사진에 ‘하나하나가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알찬 글을 담았다. 사계절은 워낙 규모가 컸던 기획의 무게에 짓눌려 중도에 작업을 포기하려 했던 적도 많았다. 최근 나온 시리즈 1차분은 그만큼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판사 스스로가 자기 한계와 가능성을 시험한 ‘모험’이었던 셈이다.박사급 연구자·유명 사진가 등 대거 참여

사계절은 시리즈 진행을 위해 따로 편찬위원회를 두었다. 지금까지 편집위원회에는 유능한 편집자·박사급 연구자·사진가·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대학 교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예컨대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고학자인 배기동 교수(한양대)는 첫째권 내용 감수자로, 고대사 분야의 권위자인 노태돈 교수(서울대)는 둘쨋권 내용 감수자로 각각 이번 기획에 참여했다. 권당 10여 명씩 일러스트레이터가 달라붙어 완성한 그림들은 곽영권 교수(서울시립대)가 다시 최종 감수했다.

그 결과 나온 책 두 권은 생활사박물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내용이 알차고 꾸밈새도 다채롭다. 장마다 수렵·채취·농경·목축 등 그때그때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그림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허투루 그린 그림은 찾기 어렵다. 모두 전문가의 고증과 유물·유적에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재현했기 때문이다.

‘일터, 생산과 창조의 현장’이라는 제목이 붙은 고조선생활관의 한 장이 본보기이다. 이 장은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농촌 사회가 출현하는 과정을 봄·여름·가을·겨울 순으로 소개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무대는 기원 전 10세기께 실제로 존재했던 마을인 평양 부근 남경 마을이다. 이 책 24쪽에는 남경 마을에서 고대인이 밭을 일구는 장면이 그림으로 나오는데, 농부의 동작에서부터 손에 들린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설명을 달아두었다. 예컨대 ‘따비’를 이용해서 밭을 갈고 있는 사람 옆에 줄을 그어 따비질을 설명하고 ‘사람의 힘만으로 고랑을 만들다 보니 고랑의 깊이가 10cm 정도밖에 안된다’는 과학적 사실도 함께 기록하는 식이다.

사계절은 이 기획을 시작할 때 도감류 출판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영국 D·K 출판사의 시리즈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한다. 내심 D·K 출판사의 책과 경쟁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번듯한 책을 펴낼 욕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획이 과연 애초 목적을 달성했는지 여부에 대해 출판사측은 ‘독자가 판단할 일’이라며 즉답을 미룬다. 실제로 이번 기획을 완벽하다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장면도 더러 발견된다. 예컨대 구석기 시대의 자연 환경에 대해서는 첫째권 앞머리에 개략적인 설명이 담겨 있을 뿐, 실제 구석기인들이 사냥하는 장면에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빠져 있다. 그만큼 보완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출판사측은 적어도 한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확신한다. 이번 기획은 비용 문제를 별로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좋은 책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무모한 꿈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출판사측 귀띔에 따르면, 최근 나온 책에는 권당 1억원 정도씩 제작 비용이 투입되었다.

이처럼 본전 개념이 빠진 ‘무모한 꿈’을 구체적 실천에 옮긴 출판사는 지금까지 드물었다. 아니 실천은 고사하고 꿈이라도 제대로 꾸어보는 출판사를 찾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한국 생활사 박물관〉 시리즈는 비록 초등학교 고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개인 출판사의 기획물이지만, 국내 출판계 전체를 대표할 만한 의미 있는 도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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