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선사 시대 ‘타임 캡슐’암각화의 신비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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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 발족 계기로 체계적 연구 본격화 …다양한 학설 제기, 대중화 작업도 활발
국보 제147호인 경북 울주군 천전리 바위 그림(암각화)을 문명대 교수를 중심으로 한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이 발견한 때는 70년 12월이었다.

이듬해 12월 문교수와 연세대 박물관 연구원이던 이융조 교수, 고려대 사학과 김정배 교수(현 고려대 총장)가 천전리로부터 멀지 않은 대곡리에서 암각화를 한 폭 발견했다. 이른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이다. 국내에서 발견된 암각화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사실적이며 내용도 풍부한 이 암각화는 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발굴을 주도한 문명대·황수영 교수는 84년 두 곳의 암각화에 대해 국내 최초로 종합 보고서를 학계에 발표했다.

이로부터 다시 15년이 흐른 올해, 국내 암각화 연구가 중대한 전기를 맞았다. 고대사 연구가·고고학자·과학사가·미술사가 등을 각각 연구해 온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지난 5월 한국암각화학회를 발족해 암각화 연구의 조직화와 연구 성과 집단 공유를 선언한 것이다.
학계, 95년에야 암각화 종합 고찰 시작

초대 회장은 초창기부터 암각화 연구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 온 고려대 김정배 총장이 맡았고, 실질적으로 학회 살림살이를 맡을 총무 이사에는 93년 보성리 암각화(경북 영천시)를 발견한 송화섭씨(전북전통문화연구소 소장)가 임명되었다. 전문가 약 80명으로 발족한 이 학회는 해외 암각화와 비교 연구하기 위해 7월 말 러시아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학계의 연구 성과를 모아 해마다 학회지를 발간할 계획이다.

암각화란 동굴이나 바위에 광물성 물감을 칠하거나 뿌려서, 또는 돌이나 날카로운 연장으로 쪼고 갈거나 선을 그어 파내는 기법으로 만든 선사 시대 그림을 말한다. 정식 명칭은 문자 그대로 ‘바위 그림’. 다른 용어로는 개별 특징에 따라 암화·암채화(물감으로 채색한 그림)·암각화(새긴 그림) 등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암채화가 발견된 예가 없어 암각화라는 용어가 주로 쓰인다.

암각화의 특징이자 최대 강점은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인 수천 년 전 인간의 생활상을 그림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암각화는 ‘선사 시대 타임 캡슐’인 셈이다. 프랑스 지역의 선사 시대 암각화를 연구한 박영희 연구원(단국대 박물관)은 그래서 암각화를 ‘문자 시대 이전의 인류 공통 언어’라고 정의한다. 역사 시대 이후 인간이 언어와 문자를 써서 생활사를 기록했다면, 선사인들은 그림을 통해 훨씬 더 장구한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문자 시대는 기껏해야 4천년 역사를 가진다).

암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이들 그림이 단순히 선사인들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 세계·종교관·미의식까지 보여준다는 데 있다. 국내 암각화 연구가 가운데 한 사람인 안동대 임세권 교수는 “암각화는 유물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선사인들의 사유 형태와 미술의 원형을 사실적 또는 추상적으로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국내 학계가 암각화를 주목하게 된 때는 95년이다. 한국역사민속학회가 처음 ‘한국 암각화의 세계’라는 학술 심포지엄을 열어 국내 암각화에 대한 종합 고찰을 시도한 것이다. 당시는 울주군 암각화 최초 발견 이후 20여 년이 흘렀고, 추가 발견도 꾸준히 이어져 전국적으로 유적지만 열다섯 군데를 헤아리게 되었는데도 이들 성과에 대해 종합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역사민속학회는 심포지엄을 통해 그동안 개별 조사·연구한 결과를 권역 별로 나누고, 기원·편년·신앙 등을 주제로 암각화 연구 성과를 체계화했다. 이같은 작업 결과는 이듬해 〈한국의 암각화〉(한길사)라는 단행본으로 세상에 나왔는데, 바로 이를 통해 국내 암각화 연구는 대중화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암각화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학계의 연구열이 어우러지면서 국내 암각화 연구는 한 단계 높이 성장했다. 해석의 객관성을 둘러싸고 똑같은 그림에 대해서 연구자마다 다양한 견해차를 드러내기도 하고, 일부 연구자들은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암각화로 눈을 돌리는 등 논의 수준을 끌어올린 것이다.

개별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좋게 말하면 학문 발전에 필수인 ‘학설’이 형성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국내 암각화의 대표 격인 울주군 대곡리 암각화를 놓고 최근 진행되는 해석상의 논란도 그 중 하나다.

대곡리 암각화의 핵심 쟁점은 고래·호랑이·멧돼지·물개·거북 같은 동물과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 형태, 그리고 사람이 탄 배에 대한 해석이다. 이 암각화에 대해 최초로 체계적인 ‘뜻풀이’에 나선 사람은 안동대 임세권 교수이다. 그는 이 암각화를 일종의 ‘제의 장면’으로 보았다. 대곡리 암각화에는 여러 동물과, 성기를 크게 과장한 인물상이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는데, 임교수는 전자를 ‘생산의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또 후자를 제의를 행하는 ‘제사장’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래 생태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고래잡이 풍습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정동찬 실장(국립중앙과학관 과학사연구실)으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정씨는 ‘대곡리 암각화가 여름에는 고래 사냥을, 겨울에는 사슴 사냥을 하면서 고래 숭배 신앙을 가졌던 집단들이 오랜 세월 자연 환경과 사냥 대상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각종 사냥법을 후대에 전수한 일종의 교육·훈련 공간이다’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정씨의 연구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암각화에 새겨진 수십 마리 고래 그림이 고래 종류에서부터 먹이를 잡아 먹을 때의 모습, 고래를 잡은 뒤 분배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밝혀놓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씨의 주장은 대곡리 암각화에 관한 한 ‘그림은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사실 그대로 보아야 뜻풀이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암각화 연구, 초기 단계 면치 못했다”

경북 고령군 양전리 암각화를 비롯해 국내 암각화의 주류를 이루는 ‘신상 암각화’에 이르면 논란은 더 거세진다. 이들은 대곡리·천전리 암각화와 달리, 대부분 한두 가지 형태의 도형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태양 숭배설’과 ‘물 상징설’ 둘로 갈린다. 현재까지는 태양 숭배설이 통설로 되어 있는데, 92년부터 중국·몽골·러시아 등지를 다니며 동북아 지역 암각화의 유기적 연관성을 찾으려고 시도해 온 임세권 교수 역시 태양 숭배설을 취한다.

반면 정동찬씨는 국내 암각화가 홍수 설화와 연결되는 지점에 분포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오히려 ‘물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태양 숭배는 날씨가 덥고 비가 적은 초원 지대에서 발생하고, 물 숭배는 비가 많은 일본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나타나는데, 국내 암각화의 상징 의미는 오히려 후자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같은 내용 분석 외에도 국내 암각화는 유적의 성격이나 기능, 표현 기법과 대상에 대한 관념, 제작 시기(편년)와 방법 등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이견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들어 암각화 연구가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지만, 기초 자료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종합적인 판단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호태 교수(울산대·고대사)는 “국내 암각화 중 두 곳은 벌써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도 국보로 지정된 곳 외에는 과학적인 실측 보고서조차 나와 있지 않다. 모든 연구는 과학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 국내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를 면치 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암각화 대중화에 나선 문화·예술인

한국암각화학회가 정식 발족한 것도 이같은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학계 반성의 산물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제까지의 연구가 주로 고고학·고고미술학 등 특정 분야 전문가들에게 제한되었고, 해외 다른 암각화와 비교 연구가 미약했다는 점이다. 임세권 교수는 이 때문에 한국 암각화 논의가 앞으로 상당 기간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같은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한국 암각화 연구는 학계 안팎에서 빠른 속도로 활성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학회를 구성한 연구자들은, 학회 차원에서 또는 개별적으로 외국 암각화와 비교 연구하기 위해 해외 출장을 계획하고 있다. 반구대 권역에 있는 울산대는 7월 지역학의 한 수단으로 〈울산 연구〉라는 학술 잡지를 창간하는데, 첫 특집을 암각화로 잡았다.

문화·예술인 들도 암각화 대중화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울산시에서는 문화·예술인 들이 발기해 암각화연구회라는 민간 단체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일반인에게 새롭게 다가가자’는 취지에서 6월 말 전시회를 열어 동양화·서양화·디자인·도자기 등 바위 그림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장구한 세월 동안 바위 표면에서 잠들어 있던 선사인들이 이제 막 깨어나 현대인들에게 말을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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