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세상 밖으로 나온 조선 시대 춘화
  • 成宇濟 기자 ()
  • 승인 200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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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혜원·정재 작품 담은 <한국의 春畵> 출간… “단원 작품 아니다” 주장도

유교의 도덕 관념이 지배 이념으로 서슬 푸르게 살아 있던 조선 시대에 ‘성(性)’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식되고 받아들여졌을까? 18세기 조선 성 풍속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얼마 전 <한국의 춘화(春畵)>(에이앤에이 펴냄)라는 화집으로 묶였다. 미술 전문지의 특집 기사나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 <인간과 성>처럼 특별한 자리가 아니고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희귀한 그림’들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한국의 춘화>에 등장한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운우도첩(雲雨圖帖)>에 실린 10점(종이에 수묵 담채, 28×38.5cm)과 혜원 신윤복의 <건곤일회도첩(乾坤一會圖帖)> 10점(종이에 수묵 담채, 23.3×27.5cm), 정재 최우석의 <운우도화첩(雲雨圖畵帖)> 10점(비단에 수묵 채색, 20.6×27.1cm)이다.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당대 최고 화가로 이름을 떨친 단원과 풍속화의 대가인 혜원과 더불어,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최우석(1899~1965)의 작품이 함께 묶여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고급스러운 춘화집’으로 탄생했다.

그동안 성을 터부시하는 사회의 통념 때문에 한국의 옛 춘화는 고미술품을 취급하는 화랑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흘러다녔다. 단원·혜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격이 있는 춘화’는 ‘누구에게 가 있다’라고만 알려졌을 뿐 그 모습을 좀체 드러내지 않았다.

조선의 춘화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4년 미술 전문지 <월간 미술>을 통해서였다. 40점을 수록했다는 단원의 <운우도첩>(1960년대에 10점씩 분책되어 세 권은 개인 소장가에게, 나머지 10점은 흩어져 돌아다녔다) 가운데 분책 한 권이 공개됨으로써 춘화가 비로소 주목되기 시작했다.

<풍속화첩> 등을 통해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은밀한 성애(性愛) 정경을 간접으로 드러냈던 혜원의 또 다른 춘화 역시 분책으로 되어 있는 <건곤일회도첩>에 실린 그림들이다.

최우석은 심전 안중식(1861~1919)에게 전통 화법을 배우고 산수·인물·영모화에 능했던 화가이다. <한국의 춘화>를 통해 공개된 그의 작품은 1930년에 완성한 화첩에 실린 그림들이다. 근대 화가인 그의 화첩(24점 수록)은 훼손되거나 흩어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번에 본격적으로 선보인 춘화는 유희만을 목적으로 하는 포르노물과는 거리가 멀다. 남녀의 노골적인 성애 장면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배경을 이루는 바깥 풍경이나 실내 장식품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단순한 성 유희를 넘어 높은 예술성을 지닌 성 풍속도 차원에 이른 것이다.

이를테면 남녀가 바깥에서 은밀하게 정사를 벌이는 단원의 작품에서, 그림의 초점은 두 남녀의 행위에만 맞춰져 있지 않다(위 그림 참조). 물기가 흥건한 먹으로 묘사된 계곡 입구에는 진분홍 진달래 꽃잎들이 자지러지게 피어 있고, 바위와 토파(土坡)가 결합하는 장면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남녀의 몸짓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단원·혜원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행위는 바로 이같은 배경과 한몸을 이룬다. 경관 묘사를 음양 결합의 암시적 형태로 표현해 주제와 부합하도록 했으며, 자연과 인간의 음양 결합을 한 화면에 병치함으로써 작품이 남녀 결합의 유희적 차원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남녀 간의 성애는 청동기 시대 암각화, 신라 시대 토우, 고려 시대 동경(銅鏡)과 청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선사 시대부터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기능해 왔다. 신라 토우에 해학적으로 등장하는 남녀의 결합이나 특별히 강조된 남녀의 상징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뜻뿐만 아니라, 성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긴 우리 조상의 성 관념을 파악하게 해 준다.

조선 시대 들어 춘화가 등장해 유행한 것은, 유교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중인이 성장해 소비와 유통 문화가 크게 발달한 18세기께이다. <한국의 춘화>에서 ‘한국 미술 속의 성’이라는 제목으로 해설을 쓴 서정걸씨는 ‘조선 시대 후기에 춘화가 유행한 것은 명대(明代) 호색 문화 유입과 관련이 있다. 아마도 명대 춘화가 조선 후기 춘화 유행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의 진경산수나 풍속화가 이룩한 독자성과 마찬가지로 춘화 역시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다’라고 설명했다.

조선의 춘화는 중국 춘화 도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조선의 성 풍속을 짙게 반영하고 있으며, 격조나 양식에서도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어 회화사적 가치를 지닌 미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세기를 전후해 판화로 제작되어 상품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중국 춘화와, 비슷한 무렵 판화의 일종인 우키요에(浮世繪)와 결합한 일본 춘화는 조선 춘화와 다른 점이 많다. 서정걸씨에 따르면, 일본 춘화는 채색과 인물 묘사, 과장된 성기, 화려한 의상과 가구 등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중국 춘화는 아름답게 채색한 정원이나 궁중을 배경으로 다양한 체위 묘사에 초점을 맞춘 성적 유희물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성 유희에 은유·풍자·해학 곁들여

조선 춘화는 성 유희 장면을 담고 묘사하면서도, 그 장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당대 사회에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들, 이를테면 한량과 기생의 관계 같은 것을 묘사한 일반 풍속화로 비치는 것이다.

배경을 이루는 자연 경관뿐 아니라, 행위가 벌어지는 주변의 경물도 의미 없이 등장하는 법은 없다. 절구와 절구공이가 있는가 하면, 참새나 개의 교미 장면을 살짝 곁들임으로써 강하게 암시하는 수법도 흔히 사용된다. 하녀나 시동이 남녀의 정사를 엿보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등장시켜 그림 보는 재미를 배가하기도 한다.

남녀가 성교하는 직설적인 표현이 있다 해도, 주변 경관이나 경물이 직설적인 표현을 누그러뜨릴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조선의 춘화가 외설 차원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 춘화에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는, 다른 풍속화와 마찬가지로 은유적 표현과 해학·풍자가 깃들어 있다는 점이다. 노골적인 성희 장면을 주로 묘사한 정재 최우석은, 그보다 더 자극적인 작품도 남겼다. 다름 아니라 댓돌 위에 남녀 가죽신만을 나란히 올려놓은 작품이다. 남녀의 성적 결합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어떤 작품보다 고도로 절제된 춘화이다.

이밖에도 성을 소재로 하여 당대의 비뚤어진 풍속을 조롱·야유하는 작품이 많다.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풍자와 해학이다. 춘화에서는 기방의 문을 열어젖뜨리자마자 허겁지겁 옷을 벗어던지며 반라의 기생에게로 달려가는 양반의 우스꽝스러운 몸짓도 보이고, 젊은 여인을 끌어들여 정사를 나누는 속물스런 표정의 살지고 늙은 승려도 등장한다. 춘화는 사회적 지위나 옷 속에 감추어진 속물 근성을 조롱·풍자하며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인 것이다.

조선 춘화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유행했다 하더라도, 중국·일본 것과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성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의 춘화를 외설물로 보지 않고 예술 작품으로 여겨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라 해도 무방한 단원이 왜 춘화를 그렸을까? <한국의 춘화>를 펴낸 이규일 에이앤에이 발행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사대부나 벼슬아치의 요청에 따라 그렸을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부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가에게 성은 하나의 화두인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조선 시대 춘화를 거론할 때마다 늘 따라다니는 문제는 ‘단원·혜원의 진품’이냐 하는 것이다. 정재 최우석의 작품이야 근대 것이어서 확실하지만, 단원·혜원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작가 사후에 찍은 ‘후낙관(後落款)’이라든가 경향으로 보아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선조가 남긴 좋은 자료·재산”

이규일 발행인은 “혜원의 작품이라는 데는 자신이 없지만, 단원의 작품은 확신한다. 단원의 작품은 사람만 지우면 완전한 회화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단원 김홍도 연구자인 오주석씨(중앙대 겸임교수)는 단원의 작품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가짜는 진짜를 꼭 닮게 마련이다. 양식으로 보면 단원 작품과 100% 같지만 작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다르다. 단원이 워낙 유명한 화가여서 단원을 본뜨고자 하는 화가가 많았다. 아마도 춘화는 20세기 들어 누가 장난을 친 것이 아닌가, 거기에 일본 사람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춘화, 특히 단원 작품에 대한 입장이 이렇게까지 엇갈리는 까닭은 춘화가 한 번도 진지한 연구 대상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구뿐 아니라 상품으로도 만들어져 전세계에 뿌려지는 중국·일본·인도의 전통 춘화와 달리, 우리의 춘화는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을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와 공개를 꺼리는 소장가들의 태도 때문이다. “이것은 선조가 남긴 좋은 재료이자 재산이다. 사장할 이유가 전혀 없다”라고 이규일 발행인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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