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운동] 관 주도 국제행사, 시민이 감시한다.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9.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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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문화 단체, 광주 비엔날레 등 국제 문화 행사 ‘관 주도’에 제동 걸기 나서
‘문화의 세기’라는 2000년대를 채 1년도 남겨 놓지 않은 지금, 한국의 문화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국제 문화 행사를 주도하는 관료들이 최고 전문가를 영입하는 데 촉각을 세우기는커녕 전문가 몰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년 벽두에 문화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전문가 몰아내기는 광주에서 시작되어 과천으로 이어지며 돌림병처럼 번져가고 있다.

95년에 시작된 광주 비엔날레는 2000년 봄 제 3회 대회를 앞두고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3월 전시총감독에 위촉된 최 민씨(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원장)가 9개월 만에 해촉되는, 세계 비엔날레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행이 빚어진 것이다.
광주 비엔날레, 전문가 집단은 ‘들러리’

1월5일 미술 관계자 1백52명이 참여한 ‘광주 비엔날레의 정상화와 관료적 문화 행정 철폐를 위한 범미술인 위원회’(범미위·위원장 김용익)가 출범해 성명서를 발표하고 고재유 광주시장(재단법인 광주 비엔날레 이사장) 등에게 공개 서한을 보냈는가 하면, 1월6일부터는 항의 엽서전을 서울 인사동 21세기화랑에서 열고 있다. 범미위는 또 1월11일 도정일(경희대·영문학)·이기우(인하대·행정학) 교수 등이 참여한 공청회를 열어 ‘관료적 문화 행정의 개혁’을 촉구하고 비엔날레 정상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겠다고 밝혔다.

광주에서는 1월11일 광주시민단체협의회(대표 윤장현)가 주관하는 공청회가 열렸다. 이 공청회에는 광주시 관계자와 이영욱 교수(전주대·미술 평론가), 엄 혁 전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팀장 등이 참여해 비엔날레 파행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지난해 12월 광주 지역 17개 시민단체가 모여 출범한 광주시민단체협의회는 ‘광주 비엔날레 정상화’를 첫 번째 사업으로 삼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밖에도 서울에서는 미술 문화 행정을 감시하는 미술인연대가 출범 준비에 들어갔으며, 광주에서도 광주문화정의실천시민연합(광주문실련)이 출범을 서두르고 있다.

문화 예술인 단체가 새로 결성되거나, 시민단체가 문화 행사를 감시하겠다고 나선 것은, 광주 비엔날레 파행이 미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광주 비엔날레는 최 민 전시총감독 해촉 사유를 ‘권한과 위상 등에 관해 계속되는 소모적인 논쟁’ ‘구체적인 업무 실적 부진’을 들고 있다.

그러나 최 민씨가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 해촉에 관하여’라는 문건에서 밝혔듯이 ‘갈등의 핵심은 정확히 말해서 관료와 전문가 집단 사이의 대립’이다. 1·2회 대회 경험을 살려 행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전시총감독과 전시기획위원회 제도를 채택했으나 관료 집단과의 대립으로 유명 무실해졌기 때문이다.

범미위가 ‘우리의 문제 제기는 새로 선임된 전시총감독을 흠집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돕기 위한 것이다. 그 분은 최 민 전 감독과 똑같은 문제에 당면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국제 미술 이벤트에서 행사를 기획·집행해야 할 미술 전문가 집단과 그들을 지원해야 할 관료 집단의 역할이 뒤바뀐 채, 전문가 집단은 행사 자문이나 하는 들러리 정도로 그 위상이 급격하게 추락한 것이다.

2회 광주 비엔날레 때까지만 해도 조직위원회를 구성한 전문가 집단은 조직표에서 ‘살아 있었다.’ 그러나 3회 대회 추진 체계도는 전문가 집단이 행사에 실질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길을 원천 봉쇄해 버렸다. 재단법인 광주 비엔날레 이사장(광주시장)을 사령탑으로 하는 추진 체계도는 사무총장(광주 부시장)·사무차장(광주시립미술관장)·사무국장·학예연구실장과 그 하부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 공무원이 맡도록 해놓았다.

최 민 전 전시총감독이 요구했던 것은 ‘전권’이 아니라, 전문 인력에 대한 인사제청권과 예산 집행과 관련된 전시기획위원회 감독권 같은 것들이다. 무려 백억원이나 투입되는 대규모 문화 이벤트의 방만한 경영을 지양하고, 1·2회 대회에서 행사의 주종을 이루었던 에어로빅 대회·장기 자랑 대회 등 이미지를 훼손하는 행사를 없앨 권한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관의 공공성과 민간의 전문성·창의성·유연성을 담아내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재단법인 제도는 전형적인 관 독점 형태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기우 교수는 “현재의 구도는 전문가와 민간을 철저히 배격하고 관료들이 행사를 주도하고 과실을 챙기되 책임만 민간에게 넘기려는 고도로 계산된 관료적 발상이다. 이러한 조직 체계를 갖고도 광주 비엔날레가 앞으로도 계속 성공을 거두며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연이고, 실패하면 그것은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세계 유수 비엔날레가 실무자 30여 명으로 운영되는 데 비해, 재단법인 광주 비엔날레에는 1백40명이 넘는 인원이 상근한다. 그 대부분은 광주시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다. 지난해에는 행사와 관련해 특별한 행사가 없었으나, 조직 운영비로 무려 14억원이나 투입되었다. 대회를 치르면서, 전시 비용이 30억원인데 조직 운영비가 40억원이라는 주객이 전도된 구태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과천 ‘세계마당극큰잔치’도 관료 잔치판

그같은 운영 방식이 부러웠던 것일까? 97년에 창설되어 국제 문화 이벤트 중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발돋움하던 과천 세계마당극큰잔치 또한 9월 3회 대회를 앞두고 파행을 겪고 있다. 세계마당극큰잔치는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와 한국연극협회가 공동 주최한 연극인들의 문화 행사로, 경기도와 과천시가 예산·행정을 지원하고 연극인들이 주체가 된 국제 이벤트였다. 세계마당극큰잔치는 1·2회 대회를 치르면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문화 정책의 기본 원칙이 잘 지켜져 왔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 12월 과천시가 공동 집행위원장제를 들고나오면서부터였다. 그 골자는 행정 지원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상근 공무원 13명을 파견하고, 전문가들이 해오던 사무국 업무를 관장하겠다는 것이다. 관의 행정 지원을 받아 민간 전문가가 주도해 호평을 받은 이 행사를 관 주도로 바꾸겠다는 뜻이다.

과천시의 의도는 재단법인 광주 비엔날레와 닮은꼴이다. ‘행정 지원 이상으로 관여할 계획이 없다’고 천명하면서도 실제적인 집행은 관이 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월6일 과천시가 내놓은 ‘과천 세계마당극큰잔치 운영 규정’을 보면 모든 집행 권한을 관이 쥐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1·2회 대회는 마당극 전문가인 임진택씨가 집행위원장을 맡아, 임씨를 중심으로 사무국을 운영하는 구조였다. 그 과정에서 관의 업무 협조는 행사가 진행될 때 상황실에 공무원 3명을 파견해 지원하는 체제였다. 과천시는 문화 행사의 모범 사례로 운영되던 그 체제를 바꾸어 상근 공무원을 파견하는 체제로 운영하겠다고 선언했다. 현 집행위원회의 상위 부서로 과천시 문화체육과장이 본부장을 맡는 행사지원본부를 새로 두어 재정 집행을 관장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세계마당극큰잔치를 기획하고 집행해 온 전문가들을 자문위원 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새로운 운영 규정에 연극인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연극협회와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는 1월6일 ‘작금의 관료주의적 행태를 철회하지 않고 파행적으로 행사를 강행할 경우 세계마당극큰잔치를 다른 지역에서 별도로 추진하고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광주 비엔날레가 퇴출 공무원 피난처인가”

지방 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경주 문화엑스포·제주 섬문화축제 등 ‘국제 문화 이벤트 만들기’ 경쟁이 벌어졌다. 수십억~수백억 원을 투입하는 문화 행사를 통해 지역을 홍보하고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 전문가들이 주축이 되어 명실 상부한 세계적인 행사로 발돋움해야 할 문화 축전들은 ‘관 주도’ 혹은 ‘관 독점’으로 진행되어 점점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광주시 공무원이 광주 비엔날레 요직을 독점하는 이유는 최근의 지방 정부 구조 조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광주 비엔날레가 퇴출되어야 할 공무원의 피난처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이기우 교수의 지적이다.

시민단체들이 문화 이벤트를 감시하겠다고 나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국민 세금과 기업 협찬으로 운영되는 문화 행사가 공무원의 피난처로 전락하는 현실을 더 이상 두고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정영재 사무처장은 “광주 비엔날레가 관의 잔치가 아니라 시민이 공유하는 축전으로 거듭날 때까지 문제를 제기하겠다. 만일 광주시가 시민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으면 큰 파동이 있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비판 사각 지대에 놓여 있던 국제 문화 이벤트들이 광주 비엔날레를 계기로 시민단체들의 감시권 안으로 비로소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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