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20세기의 바흐 비틀스
  • 임진모 (팝 칼럼니스트) ()
  • 승인 1999.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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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30주년 앞두고 지구촌 음악계 여전히 호령
비틀스가 없었다면 60년대 이후 세계의 음악 대중은 전기 기타에 의한 힘찬 록 사운드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비틀스가 나타난 뒤 음악하려는 청춘들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너도나도 증폭음 악기를 구해 밴드를 결성했다.

비틀스가 있었기에 70년대의 레드 제플린·퀸·핑크 플로이드·이글스, 80년대의 U2, 그리고 90년대의 펄 잼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통기타의 영웅’ 봅 딜런도 비틀스에 충격받아, 포크 팬들의 돌과 달걀 세례를 무릅쓰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했다.

록의 역사는 그래서 비틀스의 첫 번째 업적으로 ‘록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것을 기록한다. 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화했으나 60년대 들어 스타들의 잇단 변고로 교착 상태에 빠진 록을 구해내면서, 그들은 60년대뿐 아니라 전설이 된 지금도 음악 천하를 호령하고 있다.

지구촌 전체를 록으로 물들인 비틀스의 광대한 영향력은 한국만 보아도 즉각 확인된다. 비틀스가 미국을 정복한 64년 그 해에 국내에도 1백50개 그룹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록이 척박한 이 땅에 록의 씨앗을 뿌렸다.

그런 분위기에서 ‘한국의 비틀스’라는 김홍탁 차도균 차중락 윤항기 옥성빈의 그룹 키보이스가 출현했다. 비록 자작곡은 없었으나, 비틀스 이상으로 비틀스 곡을 잘 연주한 덕에 이들은 장안의 최고 인기 그룹으로 떠올라 60년대를 풍미했다.

예술성·사회성 아우르며 ‘록의 르네상스’ 주도

다분히 비틀스적인 곡 <꽃집의 아가씨>를 불러 유명한 봉봉4중창단도 비틀스를 연상시키는 패션과 음악으로 인기를 모았다. 봉봉4중창단은 아예 69년 비틀스 곡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번안해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운타운에서 활동하던 록 그룹 가운데 하나였던 쉐그린스도 비틀스 레퍼토리 카피 연주에 땀흘리며 내일의 도약을 준비했다. 이 그룹에서 리드 기타를 쳤던 사람이 나중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로 불리게 되는 조동진이다. 가왕(歌王) 조용필 역시 비틀스 때문에 음악에 입문했다. 68년 파주 용주골의 미8군 야간 업소에서 비틀스의 <헤이 주드>를 연주하면서 그는 우리 음악계를 장악하기 위한 고된 수련을 쌓았다.

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 록의 부흥을 이끈 들국화는, 첫 앨범 재킷 자체를 비틀스의 <렛 잇 비> 앨범 커버 식으로 꾸몄다. 이 그룹의 멤버 전인권 최성원 조덕환 등은 열렬한 비틀스 마니아였으며, 전인권에 따르면, <행진>의 창법은 존 레넌을 흉내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비틀스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들이 록 음악의 붐을 일으킨 데 이어 ‘록의 성격’까지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들 이전에 록은 하층민 젊은이들의 거리 음악이었다. 비틀스는 그것을 고전 음악 진영에서도 무시 못할 예술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이것이 그들의 두 번째 업적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고 레너드 번스타인은 심지어 “비틀스 음악은 모차르트 바흐 브람스 음악에 못지 않다”라고 했다.

또 하나, 비틀스는 방안에 꼭 박혀 화성에 충실한 예술 음악을 빚어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60년대 당시 사회의 흐름과 끊임없이 호흡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곡을 불렀을 뿐 아니라, 그 시절 젊은이들의 의식을 반영한 곡도 많이 썼다. 비틀스는 록이 예술성과 사회성이 동거하는 음악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후대 사람들이 60년대를 알려거든 비틀스의 음악을 들으면 된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비틀스는 그래서 60년대로 대변되는 ‘이상주의 시대’의 향기를 독점한다. 당시에 많은 그룹과 가수가 함께 활동했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기억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 한때 비틀스의 인기를 능가했다는 몽키스를 신세대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며, 라이벌 그룹 롤링스톤스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탓인지 추억의 정서를 느끼지 못한다. 음악 팬들한테 ‘지나간 세월’ 하면, 비틀스 하나로 충분한 것이다. 전설이 주는 일종의 특혜이다.

비틀스는 해체된 지 30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인기 최고봉이다. 해마다 전세계에서 50만장의 음반이 꾸준히 팔려 나간다. 국내에서도 비틀스 앨범은 지난해 만 장 가까이 판매되었다.

주한 영국문화원은 2000년 비틀스 해체 30주기를 맞아 2월1일부터 1주일간 <비틀스 전시회>를 열었다. 주최측도 놀랄 만큼 비틀스 사진과 영화를 보려고 많은 사람이 몰려든 것도 비틀스의 위세가 여전히 당당하다는 증거이다. 더욱이 관람객 대부분은 비틀스를 알지 못하고 자란 신세대였다.

비틀스는 또한 역사 속에서 ‘운’도 좋다. 그들의 행적과 관련된 연도가 너무도 절묘하기 때문이다. 쿼리멘, 자니 앤드 더 문독스, 실버 비틀스를 거쳐 그룹명을 비틀스로 확정한 때는 60년 6월이다. 폴 매카트니는 70년 4월 비틀스를 탈퇴한다고 발표해 팬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존 레넌은 80년 12월 극성 팬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비틀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사건, 이를테면 ‘활동 시작’ ‘해산’ 그리고 ‘리더의 죽음’이 모두 절묘하게 10년 단위의 마지막 해 또는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해에 일어난 것이다. 음악계나 언론의 처지에서는 딱딱 떨어져서 기억하기 좋고, 뭘 하려고 해도 말이 된다.

EMI, 2000년을 ‘비틀스의 해’로 결정

지난 90년 구미 언론은 비틀스 해산 20주년, 존 레넌 사망 10주기를 내걸고 다투어 비틀스 특집을 게재하거나 방영했다. 95년 EMI사는 해산 4반세기에 맞추어 비틀스의 음악 기록본이라고 할 <선집(Anthology)> 앨범을 세 차례 시리즈로 발매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1천5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또 한 차례 비틀스 붐을 일으킨 바 있다.

음악 관계자들은 비틀스와 관련한 해의 절묘함이 ‘비틀스 환생의 정기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 몇년만 참으면 비틀스를 내걸어 주의를 환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틀스의 전설 독점 현상이 더욱 견고해진다.

내년 2000년은 그러니까 비틀스라는 이름이 출현한 지 40년, 그룹이 해산된 지 30년, 존 레넌이 죽은 지 20년 되는 해가 된다. 팝계는 내년에 다시 한번 거센 비틀스 풍(風)이 불 것으로 전망한다.

영국문화원 행사가 시사하듯 한국에서도 이미 그 기류가 심상치 않다. EMI는 2000년을 ‘비틀스의 해’로 정하고 대규모 기념 이벤트와 축전을 열 계획이다. 95년의 <선집>처럼 깜짝 앨범이 나올지 모른다는 얘기도 들린다.

특별한 뉴스가 없어 고민하는 팝계의 관심은 현재 ‘뉴 밀레니엄’ 최초의 팝 스타가 누가 되느냐에 쏠려 있다. 분위기로 보아서는 근래 인기 있는 가수나 새 얼굴이 아니라 비틀스가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상황이다. 만약 새 천 년의 첫 팝 스타가 비틀스로 판가름 난다면 요즘 가수 처지에서는 한마디로 망신이다. 어쩌면 2000년 팝계는 ‘역사’와 ‘현실’의 스타가 대결하는 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비틀스에게는 음악이 있다. 그들 이후의 어떤 누구도 비틀스를 능가하는 음악을 생산해내지 못했다. 지금의 음악 수요자들마저 포박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룹이 실존하지 않아도, 일순간의 폭발성 화제를 제공하지 못해도 현실의 스타와 비교해 결코 불리하지 않다.

폴 매카트니는 언젠가 “과거 사람들이 바흐·브람스를 들었다면 2000년대 사람들은 비틀스 음악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만약 폴의 말이 맞다면 그것은 역사측 비틀스의 승리이다. 그것은 동시에 대중 음악의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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