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 魯順同 기자 ()
  • 승인 1999.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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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머리> 등급 보류 판정 받아 상영 불가능…‘위헌’ 논란 불붙어
‘착취당할 기회가 있는 것도 다행이다.’ 제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자조 섞인 말이다. 최근 한국 영화 심의 사상 처음으로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아 화제가 된 작품 <노랑 머리>(연출 김유민) 제작진의 하소연은 이러한 자조를 연상시킨다. 사연을 요약하자면 ‘고치라고 미리 귀띔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선뜻 이해가 안 간다. ‘창작자가 알아서 자기 작품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냐’ ‘자기 스스로 옹호하기 어려운 작품을 만들었다는 말이냐’라고 펄쩍 뛸 소리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으면 그 사연이 이해된다.

영화계에서는 보통 개봉관을 잡은 뒤 등급 심의를 신청하기 때문에 등급 보류를 받을 경우 일정이 엉키게 된다. 투자비를 제때 회수해야 하는 제작자로서는 부담이 크다. 등급 심사를 맡은 공연진흥협의회(공진협)도 이같은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18세 관람 가’ 등급 판정이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제작사가 알아서 수정할 수 있도록 귀띔하는 것이 관례다. 물론 공진협은 그러한 ‘협의 과정’이 없다고 부인한다. 하지만 제작자나 감독 들은 그것이 공공연한 관행이라고 인정한다. 최근의 예가 <처녀들의 저녁 식사>(연출 임상수)다. 임상수 감독은 귀띔을 받은 뒤 제작자와 협의해 일부 장면을 잘라냈다고 말했다.

<노랑 머리> 제작진은, 등급 보류 판정이 나올 때까지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제작사인 픽션 뱅크의 여한구 프로듀서는 판정 직후 “작품에 손대고 싶지는 않지만 공진협의 판단을 존중해 수정할 용의가 있다. 다만 3개월 후에나 재심을 신청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시기를 앞당겨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제작사측의 이의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등급 보류 기간이 3∼6 개월로 법에 명기되어 있는데, <노랑 머리>는 최단 기간인 3개월을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등급 보류 판정을 받으면서도 귀띔을 받지 못했고, 재심 기간을 단축해 달라는 요구까지 묵살당한 제작사로서는 ‘간섭받을 권리’가 부러울 판이다. 영화연구소 김혜준 실장도 “관례에 비추어 볼 때 공진협이 <노랑 머리>에 보인 태도는 사전 검열을 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찾아보기 어렵다”라고 비난했다.

“등급 보류는 표현의 자유 제한하는 조항”

<노랑 머리>는 영화진흥공사(영진공)가 지원하는 판권 담보 융자 대상작이라는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98년 하반기에 기획서와 시나리오 심사를 거친 뒤 제작비 3억원을 지원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진공이 제작을 지원한 작품을, 등급 심사 기관인 공진협은 대한민국 성인조차도 관람할 수 없는 영화라고 판정했다. 김유민 감독은 “공진협이 문제 삼은 혼음 장면 등은 이미 시나리오에 자세하게 상황이 설명되어 있다. 촬영하면서 수위가 높아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실제 시나리오에는 ‘한 여자와 성교하다가 다른 여자에게 사정한다’ 혹은 ‘영규, 유나의 얼굴을 핥는다. 이때다 싶게 상희, 영규의 성기를 빤다’등 지문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현재 공진협의 영화 등급 심사위원이면서, <노랑 머리>가 융자 대상으로 지정될 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조희문 교수(상명대·영화학)는 ‘영진공 지원을 받아 제작된 영화를 제재할 수 있느냐’는 비난에 대해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원작을 뽑을 때 개별 작품을 사정하기보다는 선정 기준을 놓고 원칙적인 토론을 벌였으며, 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매겼을 뿐이라고 말했다. <노랑 머리>가 순위 안에 든 것은 실험성을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말이다.

조희문 교수는 또 시나리오에 있는 설정이라고 해도 어떻게 촬영하느냐에 따라 체감하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개인적인 추론임을 전제로 “<노랑 머리>는 등급외 전용관이 허용될 것을 예상하고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가 18세 관람 가 등급을 받기 어렵다는 것은 제작자측이 더 잘 알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동안의 관행과 달리 창작자와 협의할 수 없었던 이유도 몇몇 장면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어서라는 얘기이다.

제작진의 희망대로 미리 귀띔해서 수정하도록 했다면 문제가 없는 것일까. 현실적인 파문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등급 보류 조항 자체가 위헌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노랑 머리>를 둘러싼 논란의 초점은 이 작품이 일반 극장에서 상영될 수 있는 작품인가, 혹은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창작물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현행 제도에서 등급을 받을 수 없는 영화라고 해서 유통을 금지 혹은 유예하는 것이 적법한가를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96년 헌법재판소는 작품 일부를 수정 혹은 삭제하도록 하는 (기존 영화진흥법의) 사전 심의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위헌 조항임을 밝혔다. 그 결정의 의미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전에 행정 당국이 자의로 작품을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해 영화진흥법은 수정 없이 등급만 부여하도록 개정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는 등급 보류 조처는 작품을 수정하지 않는 한 유통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집행 시기를 미루어 놓았을 뿐 엄연한 검열 장치인 셈이다. 조광희 변호사는 “등급 보류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조항임은 명백하다. 이번 파문을 계기로 개정된 영화진흥법이 위헌이라는 점이 조명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등급외 전용관 설치 서둘러야

지난 1월 ‘등급외(성인 영화) 전용관’ 조항이 빠진 채 영화진흥법이 통과된 후 전문가들은 등급 보류가 기형적인 제도라고 비판해 왔다. 등급외 판정과 등급 보류는 얼핏 유통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등급 보류는 유통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수정을 강요하는 제도임에 비해, 등급외 전용관 설치를 전제로 한 완전 등급제는 통로(극장)를 제한할 뿐 유통 기회를 봉쇄하지 않는다.

입안을 주도한 국민회의측이 필요성을 절감했는데도 등급외 전용관이 막판에 빠진 데는 여러 가지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반대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영화인 스스로 포기한 부분도 크다. 마침 법 개정 시기에 불거진 스크린 쿼터 축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밖의 문제는 눈감고 넘어갔다. 개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 참여했던 김혜준 실장은 “당시 스크린 쿼터 사수가 워낙 다급해 등급외 전용관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칙을 공유한 이상 다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등급외 전용관 설치를 전제로 한 완전 등급제는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었을 뿐 아니라, 영진법 개정 후에도 신낙균 문화부장관이 재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언제가는 풀어야 할 숙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마련하는 데는 적지 않은 난관이 예상된다. 가장 큰 걸림돌은 등급외 전용관을 포르노 극장으로 이해하는 일반인의 인식이다.

그 다음 문제는, 지난번에 마련된 개정안대로라면 등급외 전용관이 영화인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창작자로서는 작품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지만, 관객과 만날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극장주 처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등급 영화를 상영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상영작을 광고할 수 없으며, 일반 극장에 비해 과중한 문예진흥기금을 물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창작자의 욕구와 청소년을 유해 환경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사회의 요구를 고루 만족시키려면 더 치밀한 각론이 필요하다. 한 예로 김혜준 실장은 창작자에게 선택할 폭을 넓혀 주자는 뜻에서 등급외 상영관과 일반 극장에서 각기 다른 편집판을 상영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현재 <노랑 머리> 제작진은 3개월 뒤에 재심을 청구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지만, 그 앞에는 메가톤급 폭풍이 또 기다리고 있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 봐>를 원작으로 한 장선우 감독의 작품이 곧 개봉되기 때문이다. 전작 <나쁜 영화>를 통해 장선우 감독의 파격성은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촬영장을 공개하지 않은 채 제작한 이번 작품의 표현 수위는 그보다 더할 것이라는 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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