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우리것 사랑 남기고 타계한 출판인 한창기씨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7.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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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잡지사에 새 획 긋고, 토속어 되살리기 앞장
‘우리는 머잖아 그가 몹시 보고싶어질 것이다’.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이었던 김형윤씨(김형윤편집회사 대표)가 지난 2월3일 저녁 세상을 떠난 고 한창기 사장을 추모한 글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기에는 때이르지만, 예순한 살 길지 않은 생애를 살다간 고인이 남긴 업적은 일일이 열거하기 쉽지 않다.

한창기 사장은 백과사전을 팔고, 잡지와 책을 만들었으며, 판소리와 민요 전집을 제작했지만, 그리하여 우리말과 우리 전통 문화가 그의 눈과 손에 의해 세련을 이루고 그 부피를 늘렸지만, 정작 고인의 삶은 단순하고, 그래서 맑았다. 고인으로부터 잡지와 책 만드는 법을 배운 후배들은 그를 일러 ‘눈이 보배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래 되어 아름다운 우리 것을 누구보다 먼저 정확하게 읽는 빼어난 시력이었다. 그러나 진부한 것은 참지 못하는 젊은 눈이기도 했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이 내 아들 딸”

고인의 삶은 <뿌리깊은나무>에서 한 완성에 도달했다. 김형윤씨의 표현에 의하면 ‘정 줄 곳이 너무 많아 미처 가족은 만들지 못하고 홀몸으로 살고 간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뿌리깊은나무>가 아들이고 <샘이깊은물>이 딸이었다고 고인은 말한 바 있다.

한국 잡지사는 <뿌리깊은나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 잡지 이전의 잡지들은 일본판이었다. 국한문 혼용에다 세로 쓰기였고 시각적 측면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76년 3월 <뿌리깊은나무>의 출현은 가히 혁명이었다. 한글 전용에 가로 쓰기를 채택했고 디자인 개념을 적극 끌어들였다.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오는 잡지와 책들은 한사장의 완전한 참여에 의해 만들어졌다”라고 <샘이깊은물> 설호정 주간은 말했다.

완전했을 뿐만 아니라 철저했다. 사진가 강운구씨는 “세계적으로도 한창기 사장과 같은 발행인·편집인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인은 자기가 발행하는 모든 잡지와 책에 실리는 글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것도 단순한 읽기가 아니었다. 틀린 문장, 불명확한 글, 번역투에 대해서는 가차없었다. 외국 출장 때에는 팩시밀리로 원고를 받아 읽었고, 팩시밀리가 없는 지역에서는 DHL로 교정지를 받아보았다.

<뿌리깊은나무> 편집실은 문법 논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초창기에는 토속어 되살리기에 중점을 두었다. 한사장은 필자에게 몇번이고 전화를 걸어 낱말을 손보았고 글의 얼개를 바꾸었다. 그의 원칙은 명쾌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굳건했다.

고인의 생애에서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목이 법대 출신이 왜 세일즈를 시작했느냐는 것이다. 36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에서 태어나 신동 소리를 들으며 성장한 그는, 순천중·광주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법학 공부나 고시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집안에서도 판·검사 되기를 종용하지 않았다.

세일즈와의 인연은 그의 영어 실력과 연관된다. 순천중 시절 ‘미국의 소리’방송(VOU)을 들으며 영어를 익힌 그는 영어를 하도 잘해 그를 두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줄로 아는 이가 많았다. 대학 재학 중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미군 부대에서 귀국하는 미군을 상대로 비행기표 파는 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미군 영내 아르바이트 체험은 뒷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매와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몇해 전부터 서점가에 성공학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보고 고인은 ‘긍정적 사고니 자기 개발이니 하는 성공법들 다 내가 60년대에 혼자 터득한 내용들인데’라면서 세상이 온통 세일즈맨 세상이 된 것을 개탄했다고 한다. 판소리와 민요 부흥에도 전력 투구

김형윤씨의 기억에 의하면,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 초기의 고인은 영화 <딕 트레이시>에 나오는 워렌 비티를 떠올리게 하는 차림새였다. 흰 구두에 강렬한 색상의 넥타이도 맸다. 당시 최고의, 최신식 멋쟁이였다.

그러나 고인은 판소리와 민요 부흥에 전력 투구했고, 우리나라에서 한복을 제대로 입을 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으며, 한옥에 대해 전문가와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눌 식견을 갖고 있었다.

우리말에 대한 감수성과 애정 또한 남달랐다. 73년 서울대 신문대학원에서 <우리말 경어법의 사회 언어학적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94년 서정기씨가 지은 <국어문법>을 펴내는 과정에서 그동안 우리말에 대한 의문점을 모두 해소하려고 했다. 그 책 교정을 보면서 한사장은 필자와 토론하고 토론하고 또 토론했다. 저자도 경청했다. 어떤 때에는 뿌리깊은나무사 앞뜰에서 두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설호정 주간에 따르면, 고인은 이미 대학 시절, 그러니까 50년대 말에 전국을 주유하며 우리나라 산하와 대표 문화재를 섭렵했다.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으로 전통 문화가 파괴되기 직전이었다. 고인은 전통 농경 사회와 너무 일찍 결별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곤 했다. 중학교 때부터 농촌과 등을 진 것이었다. ‘만일 내가 농경 사회 체험을 더 많이 했다면 한국 문화를 살리는 일을 더 빨리, 더 많이 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73년부터 78년까지 꼭 백회를 채운 정기 판소리 감상회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한, 혹은 않은 프로그램이었다. 요즘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명창을 알아주는 눈과 귀가 없었다. 김소희·박초월 같은 명창들이 모두 그 무대에 섰다. 한사장은 모든 명창들로 하여금 판소리를 완창하도록 했다.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전집>은 그렇게 해서 나왔다.

84년에 나온 <한국의 발견>(전 11권)은 ‘신군부의 산물’이었다.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되자, 한사장은 잡지 인력을 그대로 두고 할 수 있는 사업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청소년용 백과사전과 인문지리지를 만들자는 안이 나왔는데, 한사장은 돈이 안되는 인문지리지 쪽을 택했다. 현재 스무 권까지 나와 있는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도 고인이 특별한 애착을 보인 기획이었다. 앞으로 백권까지 나올 이 책은 목수나 옹기장이 같은 전통 직업인의 이야기를 옛말·사투리 그대로 녹취하고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

보배와 같은 눈썰미로 우리말과 글, 잡지와 책, 우리 문화의 ‘진화’에 이바지한 고인의 꿈은 그동안 수집한 미술품과 한글 전적류, 토기와 옹기, 복식 자료 등으로 개인 박물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고인도 한때 ‘관직’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고향 벌교에서 가까운 낙안읍성을 지키는 읍장이 되고 싶어했다. 낙안읍성이 민속 마을로 지정되기 훨씬 전의 소망이었다. ‘한국 문화는 머잖아 그를 몹시 보고 싶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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