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리거나 베끼거나··· 영·미 문학 `엉터리 번역`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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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고전 문학 ‘만신창이’ 번역 실태…추천 가능한 책 겨우 11%
“영문학과 인연이 먼 일반 독자를 상대로, 또 그것이 무대 위에서 연출될 것을 예상하면서, 셰익스피어 원문의, 다만 의미를 번역할 뿐만 아니라 그 문체의 아름다움과 힘과, 무엇보다도 자주 나오는 언어 유희를 그대로 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역대 셰익스피어 번역자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영문학자 고 최재서 교수가 1954년 희곡 <햄>을 번역하면서 남긴 말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까다로운 셰익스피어의 원문을 매우 충실하고도 정확하게 옮긴 번역으로서, 문맥을 잘못 이해한 중대한 오역은 말할 것도 없고 소소한 오역조차도 찾기 힘든’ 거의 완벽한 번역본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국내 외국 문학 번역 시장에서 이처럼 완벽한 ‘작품’을 만나기란 무척 힘들다. 영미문학연구회(공동대표 오민석·서강목) 번역평가사업단이 국내에 소개된 영·미의 대표적 문학 작품 36편에 대한 번역본 5백73종을 분석한 결과는 참담하다. 전체 검토본의 54%(3백10종)가 남의 번역본을 완전히 표절하거나 적당히 윤색만 거친 것으로 드러났다.
검토본 가운데 겨우 11%(61종)만이 추천 가능한 번역본으로 선정되었다. <로빈슨 크루소> <오만과 편견> <위대한 유산> <모비딕> <무기여 잘 있거라> <허클베리 핀의 모험> <호밀밭의 파수꾼> 등 열세 작품은 추천할 만한 번역본이 아예 한 종도 없었다.

이런 충격적인 내용은 번역평가사업단이 최근 공개한 ‘영미 고전문학 번역 평가 사업’ 최종 보고서에 실려 있다. 이번 보고서는 지난해 3월 <오만과 편견> 번역본에 대한 ‘샘플 평가’(<시사저널> 제699호 참조)를 공개한 지 1년 만에 나온 최종 결과이다. 김영희 교수(과학기술원·영문학)를 비롯해, 설준규 송승철 윤지관 오민석 서홍원 오길영 등 영문학 연구자 44명이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광복 이후 지난해 7월까지 남한에서 발간된 영·미 문학 고전들을 샅샅이 분석한 결과물이다. 그동안 국내의 번역 실태를 꼬집는 글은 많았지만, 이처럼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분석 결과물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조사 대상에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비롯해 <실낙원> <테스> <폭풍의 언덕> 등 영국 문학 고전 22종과 <무기여 잘 있거라> <모비딕> <분노의 포도>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미국 문학 대표작 14종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완벽한 별 셋(★★★)을 받은 번역서는 최재서 역 <햄>(연희춘추사, 1954년) 김진만 역 <캔터베리 이야기>(정음사, 1963년) 이상옥 역 <젊은 예술가의 초상> (박영사, 1976년) 김영희 역 <토박이>(한길사 1981년, 창비 1993년), 김진경 역 <도둑맞은 편지>(문학과지성사, 1997년) 등 모두 여섯 권이다.

<도둑맞은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집은 최근 번역된 판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뽑혔다. 번역평가사업단은 “문장이 자연스러우며, 작품 이해에 장애를 초래하는 오역이나 부적절한 번역은 거의 없고 소소한 오류들이 가끔 눈에 띄는 정도다”라고 평했다.

이번 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햄릿> <리어왕> 등 셰익스피어 희곡이나 밀턴의 <실낙원>처럼 시로 된 작품의 번역은 그 중 낫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 희곡 네 편의 번역본 가운데 비표절본의 경우는 43~56% 정도가 추천할 만한 번역본으로 집계되었으며, <실낙원>과 <캔터베리 이야기>도 번역본의 절반 이상이 양호한 편이었다. 장르의 특성상 전문가들이 주로 번역에 참여한 덕분이다.

반면 비교적 문장이 쉬운 근·현대 문학 작품의 번역 상태는 실로 엉망이다. 특히 소설의 경우 추천할 만한 번역서는 전체 대상본의 6%에 불과하다. 미국의 현대 작가 중에서 국내에 가장 널리 알려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에 대한 번역 실태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장편소설치고 그리 길지 않은 데다가, 헤밍웨이의 문체가 간명하고 건조해 읽기 쉽고 번역하기도 쉽다고 알려져 있어 번역서가 무척 많다. 1957년 김병철 본(동아출판사)이 처음 나온 이래 현재까지 모두 93종이 쏟아졌다. 번역평가사업단은 이 중 확인 가능한 38종을 대상으로 평가 작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추천할 만한 번역본이 한 종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전체 검토본의 66%(25종)는 표절본이었다.

오역 사례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가장 흔한 사례는 대충 요지만 전달하고 생략해버린 경우. 김병철 본은 ‘the water was clear and swiftly moving and blue in the channels’를 ‘강물은 맑고 흐름이 빨랐다’고 옮겼다. ‘물길에서는’이라는 뜻의 ‘in the channels’ 부분이 번역에서 누락되었다. ‘강이 말라서 강바닥이 많이 드러나 있지만 물길에서는 물이 맑고 빠르게 흘렀으며 푸른빛이었다’는 맥락으로 쓰여진 원문이 ‘물길에서는’이라는 대목이 빠짐으로써 강이 말랐다는 이야기와 앞뒤가 안 맞게끔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오역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이가형 본(고려출판사 1979년)은 ‘when I was out where the oak forest had been’을 ‘참나무 숲 근방에 나갔는데’로 옮겼다. 하지만 이 대목 앞에는 이미 참나무 숲이 사라지고 없었다는 언급이 있다. ‘참나무 숲이 있던 곳에 나갔는데’라고 옮겨야 했을 부분이다. 또한 ‘the bare wet autumn country’는 ‘노출된 축축한 가을의 시골 풍경’이라고 번역했지만, ‘헐벗고 젖은~’으로 옮겨야 적당하다. 이렇게 대부분의 오역본에는 우리말 문장이 비문이거나 단어 선택이 어색한 대목이 많다.

심지어는 ‘six months gone with child’를 ‘임신 칠개월’(‘임신 육개월’의 오역)이라고 옮겨놓고, ‘only seven thousand died of it in the army’를 ‘자그만치 칠천명의 군대가 희생을 당했다’(‘군대에서 겨우 칠천 명만 죽었다’의 오역)라고 번역한 책도 버젓이 시중에 유통되었다.
이렇게 엉터리 번역본이 끊임없이 출간되는 이유는 번역 경시 풍조와 관련이 깊다. 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번역이 학술 업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고전 번역을 기피하고 아마추어 번역가들이 대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중에는 유명 학자가 이름만 빌려주고,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번역한 뒤 제대로 된 감수도 없이 펴낸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원로 영문학자 김진만 교수의 번역으로 1963년 정음사에서 첫 번역본이 나왔다. 김진만 본은 원문 이해, 문학적 의미 재생, 번역본 전체에 일관된 번역 원칙 등 모든 면에서 대단히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은 번역본이다. 그런데 동일한 번역자의 이름으로 문공사(자이언트문고본, 1982년)에서 나온 번역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와 오역을 안고 있다. 번역평가팀은 “이러한 오역본이 제대로 된 훌륭한 번역본을 만든 번역자와 동일한 이름으로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여겨진다”라고 평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올해 말 단행본으로 나올 예정이다. 영미문학연구회는 이번 사업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을 대상으로 2차 번역평가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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