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사투리]왜 발음은 ‘개혁’되지 않는가
  •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 ()
  • 승인 1997.01.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YS, 기자회견서 경상도 방언 연발…PK 정권의 독선 상징어로 들려
지난 7일 오전에 있었던 김영삼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은 그 내용을 떠나 시종 일관 불안했다. 원고를 쳐다보기 전 그가 행한 새해 첫마디는 국민에 대한 정중한 인사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서설(瑞雪)에 대한 감사였고, 도망치듯 마무리하는 모습 또한 보기에 여간 민망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 때문에 명색이 기자회견이라는 이름의 행사 자체가 무색하게 된 일이었다. 그것은 주로 그의 강한 경상도 방언 때문이었다.

김대통령은 발표문에 쓰인 우리말을 정확하게 읽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특히 기자들과 일문일답하는 과정에서는 동향 사람조차 제대로 알아 듣기 힘든 발음이 속출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에 유행한 ‘YS는 못말려’ 시리즈에서는 말의 장단을 구분하지 않고 복모음은 아예 무시하는 그의 독특한 사전(辭典)이 인간적 매력쯤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런데 퇴임하는 해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된 기자회견장에서 그가 특정 지역의 사투리를 수없이 구사했다는 사실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급 신분어가 된 경상도 사투리

방언 자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산업화·도시화·세계화와 더불어 우리 주변에서 급속히 사라지는 사투리에는 그리움이 있다. 그러나 서당 훈장이 ‘바담 風’하면 아니되듯 대통령은 반드시 (서울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을 사용해야 한다. 최소한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면 ‘교육 대통령’이라는 말은 아예 끄집어 내지도 말아야 한다. 교육 ‘게핵’은 처음부터 비교육적이다.물론 사투리란 오랜 습관이다. 그러나 천성이 아니고 습관이기 때문에 고칠 수 있고, 또 고쳐야 한다. 그것은 최고 공직자의 성실성 문제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맡은 직분을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감히 의심하랴. 부정한 돈 한푼 받지 않은 채, 새벽 조깅 거르는 법 없이 칼국수로 점심을 때운다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그가 표준말을 사용하지 않는 데는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경상도 사투리라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60년대 이후 경상도 방언은 단순히 수많은 사투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TK이든 PK이든 그것은 서울공화국을 경상도 천지로 바꿔놓은 ‘점령군’들의 암호였다. 국무회의에서나 당무회의에서나, 그리고 군 수뇌회의에서나 검사장회의에서나 넘쳐 흐르는 것은 그저 경상도 말이었다. 아마도 사적이거나 비밀스러운 회동에서는 더욱 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은 표준말로 ‘개종’(改宗)하기를 거부한 채 사투리를 통하여 아군을 확인하고 적군을 구분했다. 그것은 ‘이긴 자’들의 심벌이자 ‘가진 자’들의 배지였다. 이렇듯 경상도 방언이 일종의 고급 신분어가 된 이상, 전라도니 충청도 혹은 강원도 사투리는 일제 시대 말기 ‘조선어’와 같은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이처럼 사투리 정치학의 소재(素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이 표준말을 외면하는 행위는 개인 차원 이상의 커다란 정치적 부작용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지난 30여 년 동안 서울공화국의 지배 언어가 되어버린 경상도 방언에는 나머지 지역과 소외된 계층의 아픔을 경시하는 TK·PK 정권의 독선이 내재되어 있다. 사투리를 사용함으로써 불편한 처지는 듣는 쪽이지 결코 말하는 쪽이 아니기에, 거기에는 국민을 무시하는 국가의 오만이 부풀어 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경상도 방언은 주변 문화라기보다 중심 권력이다.

이러한 사실은 금년도 대통령 연두 기자‘헤견’에서 극치를 이루었다. 여권 대선 후보를 직접 고르겠다는 각오, 야당 총재들을 만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 새로운 노동법은 선진국형이라는 주장, 그리고 개정된 안기부법이 민주주의의 자위책이라는 궤변은 바로 경상도 사투리의 YS 군주론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말과 마음은 본디 뿌리가 같은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