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96년 출판계, 인문교양서 열풍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7.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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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씨 이야기> 판매 1위, <나무야 나무야> 좋은 책 1위
<좀머씨 이야기>와 <아버지>, <나무야 나무야>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앞의 두 책은 96년 한 해 동안 독자들이 가장 많이 찾은 소설이고, 뒤의 두 책은 96년에 나온 교양서 가운데 가장 좋은 책 1, 2위로 꼽힌 책이다. 두 교양서는 독자가 아니라 책을 만드는 사람들(전국출판노동조합협의회)이 뽑은 것이다.

96년 베스트 셀러는, 상반기의 <좀머씨 이야기>와 후반기의 <아버지>로 압축된다. 경찰 출신인 무명 작가 김정현씨의 장편 <아버지>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중년 가장의 가족 사랑 이야기인데, 이른바 명예 퇴직 증후군과 맞물려 폭발적인 반응을 몰고왔다. 이 두 베스트 셀러는 모두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의 해가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조합원 및 주요 단행본 출판사를 대상으로 ‘올해의 좋은 책 10’을 선정한 전국출판노조협의회(의장 박강호)가 지적한 것처럼 문학 분야에서 주목된 좋은 책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아래 도표 참조).

베스트 셀러 50위 가운데 소설 18종

교보문고가 모두 14개 분야로 나누어 집계한 96년 종합 베스트 셀러 50위를 살펴보면 소설(18종)과 비소설(15종)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 다음이 외국어(4종) 경제(4종) 인문(3종) 컴퓨터 순이다. 소설 분야는 95년 6종에서 18종으로 대폭 늘었는데, 교보문고는 그 주요인으로 지난해까지 출판사들을 전전긍긍하게 했던 도서대여점의 거품이 가라앉았기 때문으로 보았다.

베스트 셀러 목록을 약간 벗어나 살펴보면, 96년 출판계의 큰 흐름은 인문서 부흥이다. 이 흐름을 주도한 견인차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마빈 해리스로 대표되는 인류학 번역서. 인문교양서는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생활사> 등, 우리것 바로 알기로 번져나갔다. 하반기에 나온 <국역 완당전집> <국역 다산시문집>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국학의 대중화에 이바지하고 조선학의 토대를 닦았다.

일련의 시오노 나나미 번역서와 <신의 지문>이 가세한 인문서 열풍은 한길사의 ‘그레이트 북스’ 문학동네의 ‘신화상징총서’ 등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90년대 ‘진보 이론’인 문화론과 성으로 확산되었다. <현대성과 현대문화> <고독한 대중> 등 다양한 문화연구서들이 잇따랐고, <성애의 사회사> <혼인의 기원> <권력과 매춘>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등 성에 진지하게 접근한 학술서들도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성이 소설과 만났을 때 실정법의 서슬은 시퍼랬다. 미술비평서인 <에로스 훔쳐보기>에 의해 예열되었던 외설 시비는 열음사의 <에로티카>와 김영사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열음사는 출판사 등록 취소를 당한 뒤 등록 취소 가처분 신청을 내놓았고, 김영사 문제는 현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문학의 해 후반기를 뒤흔든 외설 시비는 표현의 자유 문제와 맞물려 문단과 출판계로부터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출판 경향에 의하면 인문학이 부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출판 통계는 이같은 청신호를 부정한다. 출판협회가 96년 1월부터 10월까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학술서 출판이 크게 감소했다. 철학 분야는 5백94종으로 전년 대비 22%, 역사는 11.7%, 문학은 5.5%가 각각 줄어들었다. <출판저널>은 이같은 현상을 개정 저작권 발효가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7월1일부터 강제력을 갖기 시작한 개정 저작권은 사후 50년이 안된 작가는 무조건 저작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결국 학술서 출판은 열악한 시장성에 인세 부담이라는 이중고를 떠안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온 것이지만, 학술서를 적극 수용하는 공공 도서관의 역할이 정착되지 않는 한, 그리고 학교 교육이 정상화하지 않는 한(요즘 대학은 ‘고시열풍’으로 인문학이 무너지고 있다) 학술 출판, 즉 인문학의 부흥은 요원하기만 하다.

비소설 분야는 96년 한국 사회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등 서울대에 들어간(들여보낸) 주인공들의 합격 비결은, 인간 승리 혹은 새로운 교육 모델을 선보이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일류병’이라는 한국병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 <아버지> 열풍은 학습서의 급신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학부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리즈를 자녀들에게 쥐어줘야 했고 회사 인간들은 <초학습법>과 <뇌내혁명>, 그리고 컴퓨터 관련 서적 들을 끼고 다니며 공부했다. 영어 회화로 대표되는 공부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경쟁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한 안간힘을 출판은 여실하게 반증한다. 일류가 아니면 살아 남지 못한다는 한 대기업의 광고 카피는 이제 하나의 강박으로, 모든 계층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안 리·전여옥 씨로 대표되는 성공한 여성들의 자서전은 몇년 전부터 베스트 셀러 목록에 줄곧 올라 있었다. 독자들은, 그러니까 96년 한국 사회는 왜 일류가 되어야 하는지, 왜 성공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보다는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을지서적은 <무소유> <인연> <나무야 나무야>와 같은 잔잔한 수필류가 성공한 여성들의 자전적 이야기를 밀어내고 있다면서, 96년 출판계에서는 의사들이 쓴 책과 귀순한 사람들의 에세이가 강세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의사들이 쓴 책 중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가 돋보였다. 정신과 전문의가 쓴 <전생요법>은 전생 증후군을 몰고 오기도 했다. 소설가 양귀자씨의 베스트 셀러 <천년의 사랑>이 일으킨 파도에 각종 전생 관련 서적들이 파도 타기를 한 것이다.

선집·전집류 출판 줄 잇기도

문학 분야에서는 선집과 전집류가 때를 만난 듯 줄을 이었는데, 조지훈·김승옥·이문구·박완서·김윤식 전집 등이 문학의 해의 참뜻을 빛냈다. 특히 그동안 정리되지 않은 채 서가에 꽂혀 있던 한국 현대 문학을 정리한 <한국현대대표소설선>과 <한국명시>는 역작으로 꼽힌다. 새롭게 엮은 문고 시리즈도 되돌아볼 만하다. 고려원의 ‘페이퍼백’과 지난 12월에 첫선을 보인 문학과지성사의 ‘문지스펙트럼’은 70년대 후반 전성기를 구가했던 문고판 시대를 재현하기 위한 야심에 찬 기획이다.

문학 분야 밖에서는 박영률출판사의 ‘대전환 21세기 총서’와 한울의 ‘시민을 위한 작은 책’도서출판 보리의 ‘작은 책 문고’ 삼성출판사의 ‘100과 사전’ 펀앤런스북스의 ‘펭귄클래식’ 등이 다양한 편집 방향으로 문고판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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