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산업]지역 축전 “신명과 색깔이 없다”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6.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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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50여 개 비슷비슷… 기획력·전문성 키워야
지난 12월11일 하루 동안 충남 공주시는 ‘박찬호의 도시’였다.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금의환향한 그를, 공주시는 카퍼레이드까지 마련해 열렬히 환영했다. 목에 화환을 걸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환호에 답하는 박찬호의 모습은 신문·방송을 통해 일제히 퍼져나갔다. 카퍼레이드라는 이벤트를 통해 공주시가‘야구 스타 박찬호를 낳은 도시’라는 점을 전국에 동시다발로 확인시킨 셈이다. 야구 팬이라면 이제 공주라는 도시에서 백제보다는박찬호를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지방화 시대가 열린 지난해부터 지방자치단체들이 앞을 다투어 축전이며 문화 행사를 여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바야흐로‘지역 축전 전성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이미지 광고에 큰 힘을 쏟는 대기업 못지않게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미지 홍보전을 벌인다. 그리고 가장 유효한 전략으로 지역 잔치와 같은 문화 행사를 채택하는 것이다. 광주 비엔날레를 통해 항쟁의 도시에다 미술 도시라는 이미지를 하나 더 얹어놓은 광주시가 그렇고, 올해 국제 영화제를 주최한 부산도 마찬가지다. 93년 엑스포를 개최한 대전은 지금도 그 깃발을 높이 올려놓고 있다.

지역 특산품, 환경 조건 특화해야

지방화 시대와 문화 시대가 동시에 열린 이때, 문화 상품을 지역 산업의 중요한 품목으로 생산하려는 움직임은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 도시에까지 급속하게 번져나가고 있다. 97년 5월에는 경기도 고양시가 세계꽃박람회를 열어‘꽃 도시’면모를 국내외에 과시할 참이고, 경기도 부천시도 97년 10월께 국제 영화제를 마련해 영화 도시로서 새로운 면모를 과시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각 지역이 축전을 비롯한 문화 상품 생산에 경쟁적으로 뛰어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문화가 지역을 홍보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점과 더불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사실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국내외 관광객들의 욕구 변화는 각 지역이 문화 이벤트에 눈을 돌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 관광의 흐름이 자연 경관을 즐기는 단순한 형태에서 벗어나 다른 민족이 사는 방식, 곧 지역의 특수한 문화를 체험하려는 추세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문화체육부 국제관광과 이유범 사무관에 따르면, 관광 형태는 풍광 관광에서 시작해 사적 관광을 지나 민속 관광으로 발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보는 관광’에서 ‘탐구하는 관광’으로, 다시 각종 이벤트에 ‘직접 참여하는 관광’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칸·아비뇽·베니스 같은 도시들이 세계적인 영화·연극·미술 축전을 여는 궁극적인 목적이 관광객 유치에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맥주나 기후 같은 지역 특산품이나 환경 조건을 매개로 잔치를 열고 문화 상품화하는 경향은 지방자치제도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두드러진다.

세련된 축전을 열어 지역 경제를 일으킨 사례는 지방자치 선진국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벤트 관광 전략을 연구하는 정강환 교수(배제대·관광경영학)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캐나다 퀘벡의 겨울 축전을 꼽는다. 퀘벡 시의 2~3월은 중요한 수입원인 관광의 비수기일 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가 가장 침체되는 시기였다. 이 지역 상공단체들이 제안해 54년부터 시작된 겨울 축전은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하여 서서히 자리를 잡아왔다. 겨울 축전이 큰 성공을 거둔 지금 2~3월은 가장 분주한 시기로 탈바꿈했다.

한국에서도 크고 작은 지역 축전이 1년에 3백50여 개나 열린다. 그러나 이 잔치들은 급박하게 진행된 산업화·도시화의 여파로 전통 잔치의 신명나는 난장을 모두 잃어버린 뒤, 3공화국 들어 관이 나서서 만든 문화제·예술제가 대부분이다. 이것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비슷한 시기(문화의 달 10월)에 비슷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 미인선발대회·씨름대회·팔도장터·백일장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통 항목이다. 잔치에 신명나게 참여해야 할 지역민들은 관에 동원되어 오히려 신명을 잃어버리고, 지역민도 감동시키지 못하는 잔치에 외부인이 찾아들 리가 없다.

문제는 지역 축전을 이벤트화하는 전문성이다. 한국에도 모범적인 지역 축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89년에 시작되어 이제는 춘천을 대표하는 잔치로 자리잡은 춘천인형극제, 지난해와 올해부터 새롭게 태어난 이천 도자기축제와 금산 인삼제, 바다가 갈라지는 장관을 축전으로 연결한 진도 영등제는 한국의 지역 축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들로 꼽힌다. 이 잔치들의 공통점은 문화 기획 전문가들의 기획력이 발휘되어 무엇보다‘지역민들이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잔치’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특히 춘천시에서 해마다 8월에 열리는 인형극제는 민간이 주도해‘도시의 간판’으로 밀어올린 국내에서 유일한 축전이다. 89년 이전까지만 해도 춘천시는 인형극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89년 춘천어린이회관을 위탁 운영하게 된 (주)바른손이 문화 기획가 강준혁씨에게 장기 프로그램을 의뢰한 것이 춘천 인형극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인형극을 활성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온 강씨는 행사의 목표를‘시민의 잔치’‘거리의 잔치’‘인형극인들의 잔치’로 설정했다.

올해 8회를 치른 춘천인형극제는 세 가지 목표를 모두 이루었다. 15개 극단이 참가한 소박한 형태에서 점차 발전해 올해에는 국내외 60개 극단이 몰려온 국제적인 잔치로 성장했고, 거리와 연결된 공연들은 해를 거듭하면서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소비 중심지인 명동의 20여 상가가 ‘거리 인형 전시장’으로 쇼윈도를 제공하는가 하면, 자기 차량을 가지고 인형극인들에게 수송 봉사를 하는 시민들도 생겨났다.
이천군·금산군, 전문 기획가 도움받아 성공

춘천 인형극제가 아직까지 지역 경제를 활성하는 데 그다지 큰 성과를 나타내지 못한 반면, 도자기와 인삼이라는 구체적인 상품을 매개로 잔치를 벌인 경기도 이천과 금산은 전문가의 기획을 받아들여 지역의 이미지 제고는 물론 큰 수입까지 올리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은 이천 도자기축제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수익을 5천만원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서울광고기획이 이벤트를 주관한 지난해에는 수익금이 6억원으로 늘어났고, 올해에는 도자기 판매와 숙박 등으로 얻은 총수익이 60억원에 이르렀다. 국내외를 향해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홍보하고 도자기와 관련한 각종 볼거리를 제공하며, 방문객들로 하여금 도자기를 직접 만들고 전통 가마에 불을 지피게 하는 이벤트를 만들어냄으로써 17일 동안에 60억원이라는 돈을 벌어들였다.

16회째를 맞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이벤트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금산 인삼제도 5일 동안 인삼 판매액으로 거둬들인 수익이 97억원에 이른다. 40억원 정도 수익을 올렸던 지난해와 비교해 2배 이상의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던 요인은 이벤트 전략 덕분이었다. 96년 금산 인삼제의 총괄 기획 및 운영을 맡은 서울광고기획 이각규 부장은“금산에 인삼을 전했다는 강처사의 설화를 마당극으로 꾸며 매일 공연하는 등 이 지역 특성과 인삼과 관련된 참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외부인들이 금산이라는 지역에 와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를 제공하는 데 특히 역점을 두었다”라고 말했다.

“일단 튼튼하게 낳고, 사람 키우듯 육성해야”

춘천·이천·금산·진도 등지에서 성공한 지역 축전은 지역 이미지 제고와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보다 훨씬 큰 효과를 낳았다.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신명나는 판을 마련함으로써 동질감은 물론 자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축전의 본래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를 두루 만족시키는 한국의 지역 축전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수가 적다. 축전 만들기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은 무작정 신기루를 쫓는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기업 이벤트에서 노하우를 쌓은 금강기획 같은 광고대행사들이 나서고 있기는 하지만, 기획력을 갖춘 전문가가 드물고, 그 전문성이 제대로 대접을 받는 풍토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획 비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탓에 전문성을 쌓아온 작은 이벤트사들이 문을 닫는가 하면, 일부 이벤트사가 행사 비용에서 이익금을 챙기는 바람에 행사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게다가 지역 축전을 임기내 치적으로 삼으려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정치적 계산 때문에 잔치의 진정한 의미가 흐려질 우려도 다분히 있다. 관이 주도해 새로 만드는 축전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 충분한 준비 기간을 거쳐 서서히 성장시켜 나가기보다는 많은 예산을 투입해 첫 회부터 큰 성과를 끌어내자는 초조함과 성급함이다. 지역민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벼락부자의 꿈만 꾸는 잔치가 양산될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지역 축전은 이제 한국에서도 문화 산업의 중요한 영역으로 들어와 있다. 그 성공 여부는 우선 이를 만드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의지와 태도에 달려 있다.“임기 내에 성과를 볼 욕심에 몰아치기 식으로 한다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시작을 한다는 의미도 중요하다. 일단 튼튼하게 낳아놓고 사람을 키우듯 오랜 기간 정성을 들여야 성공한다.” 첫회 때부터 춘천 인형극제 집행위원장을 맡아온 강준혁씨의 체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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