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받은 김기덕 감독 인터뷰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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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외에 다른 잣대 휘두르는 것은 싫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사마리아>가 3월5일 개봉된다. 언론 시사가 있던 날 기자회견장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수상작이라는 막을 벗겨내고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곳곳에 저예산의 흔적이 역력하다”라고 겸연쩍어하면서도 “왜 해외 영화제가 김기덕에게 주목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라며 슬쩍 자신감을 내비쳤다.

영화제가 끝나기 전 베를린을 떠났다. 수상을 예상하지 못했나?

이전에 베니스나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는 제작사나 배급사의 권유로 끝까지 눌러앉아 있곤 했다. 못할 짓이더라. 제작자나 배급자는 수상을 못해도 부담이 없는데, 나는 리스크가 컸다. 나의 염치없는 본성을 발견하고 이번에는 일찍 철수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고 참석했고, 계획대로 한 것일 뿐이다.

염치없는 본성이라니?

복권 사놓고 안 맞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나. 경쟁 부문에 들어가면 누구나 수상을 기대한다. 켄 로치 같은 거장들도 끝까지 남아 있다가 결국 빈손으로 갔다. 60~70세 되는 사람들도 마음을 비우기가 어렵다는 뜻 아닌가.

수상 후 달라진 시선을 느끼는가?

이번 시사는 참 따가운 시사였다. ‘그래 어디 어떤가 보자’는 태도가 있을 테니까. 수상작이라는 막을 걷어내고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어떤 기자가 ‘상 타고 나니 통쾌하지 않느냐’고 자꾸 묻더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심리적으로 우등해졌다고 열등했던 시기를 보상받으려 하면 안된다.

재미난 말을 많이 쏟아냈다. ‘이창동 감독이 만들면 사회를 보는 시선이고, 내가 만들면 자기가 경험한 일인가’라든지.

방송에서 딱 그 부분만 떼어 방송하는 바람에 (웃음). 이건 확실하다. 한국 사회에서 김기덕은 버리지도 못하고 줍지도 못하는 감독이다. 안을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열악한 조건에서 영화를 만들어내는 나 같은 사람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도태되는 걸 기다린 사람도 있다. 이렇게 상까지 받았으니, 골칫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어제 시사 후 기자들이 질문을 못하는 거 보고, 그걸 느꼈다.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모르는 영화가 온 것이다. 어제 내 영화가 이해가 가던가?

이전 작품들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작들은 상이라도 안 걸쳤으니까. 이제는 국제 영화제에서 상까지 주었으니 비평가 스스로 한번 더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또 예전에는 내가 영화에서 자의식을 온전히 드러냈다면, <사마리아>는 그런 접근도 쉽지 않다.

한국 비평가들이 호의적이지 않다고 느끼나?

비판이라기보다 비난이 많았다. 인신 공격까지 있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만 이해할 수 있는 얘기를 한다 등등. 나는 이제 그런 이야기가 영화 교과서에 나온 지식에 갇힌, 진짜 공부가 모자란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여긴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정직하게 테이블에 앉은 게 아니라, 외국의 권위 있는 영화제를 통해 우회해서 온 것이다. 학력주의나 계급주의 털어내고 한번 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서도 영 아니면 아니라고 얘기하라.

왜 그런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영화사에 돌연변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통주의 교육에 편입되지 못한 내가 돌연변이를 만들어냈으니까. 영화제 나들이가 참 많다.

잘 읽히는 시나리오를 쓰고 톱스타를 끌어들이면 큰 영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나는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 영화를 엄선해서 띄워주는 곳이 영화제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오라는 영화제가 너무 많아 프린트를 줄 수가 없을 정도다. 8년 동안 만든 영화가 열 편이다. 3백∼4백개 영화제에 나갔다. 한국 관객보다, 해외 관객(영화제 관객)이 더 많을 것이다. 누구는 한국에서 1천만 명을 동원하는 목표를 세우지만, 나는 언젠가는 전세계 100개 나라에서 1천만 명 이상이 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돈이 나한테 오지는 않을 테지만(웃음).

사디즘-마조히즘이니 정신분석학이니 난 모른다, 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반어법인가?

<나쁜 남자>를 내놓았을 때 여성신문인가에서, 날 싫어하는 사람 모두 모여 얘기하더라. 변태니 뭐니 상당히 심한 말도 나왔다. 내가 글을 남겼다. ‘그럴지도 모른다. 내 영화가 당신들을 불쾌하게 했다면 사과를 드리고 용서를 구한다’고 했더니 그 다음에는 ‘당신은 피학을 즐긴다’는 비난이 날아들었다. 사람들이 마조히즘이니 나르시스즘이니 하며 내 영화를 평한다. 솔직히 나는 그런 이론들은 접하지도 않았고 내게 의미가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내가 비평가나 여성운동가를 욕할 수는 없다. 동시에 나에게도 내 방식대로 질문할 자격이 있다.

<악어> <해안선> <나쁜 남자> 등에서 남성 주인공들은 무시당했을 때 격렬하게 맞받아치는 캐릭터가 두드러진다. 좀 해묵은 느낌인데.

한국 사회가 여전히 심리적인 폭력에 둔감하기 때문에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나쁜 남자> 첫 장면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폭력적인 키스를 퍼붓는다. 하지만 그의 폭행 이전의 폭력, 즉 여성이 남자를 보는 경멸 어린 시선이 더 무서운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사마리아>에서 소녀와 잠을 잔 남자가 ‘오해하지 말고 살아야 해’ 혹은 ‘평생 너를 위해 기도할께’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관객들이 ‘와’ 웃었다. 유머로 배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웃던가? 그랬다면 관객들이 9시 뉴스 식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조교제를 하는 남자들을 통념대로 악독하게 그리지 않고 미화한 것은 다른 차원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자기를 이해하고 기쁨을 준 소녀에게 고맙다고, 오해하지 말고 살자는데 뭐가 웃기는가. 나무랄 데가 없는 남자인데 미성년에 대한 성적 욕망이 있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자기 욕망을 소녀가 이해해 주는데 고맙지 않을까. 웃는 것은 결국 ‘저런 더러운 놈이 저런 말 할 자격이 있어?’라는 완고한 자기 잣대 때문이다.

성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화 대사 때문에 묻는 것이다. 여진이 한 남자에게 죽어가는 재영한테 가자며 ‘남 아니잖아요’라고 말한다. 한번 잤을 뿐인데.

그건 재영의 생각을 여진이 대신 말하는 것이다. 재영이 그 남자를 좋아했으니까. 그 장면은 다른 이유로 중요하다. 여진은 죽어가는 친구 재영에게 남자를 데려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준다. 우정을 위해 순결을 버린다. 여진이 물질적인 삶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계기이다. 내가 영화에서 그렸던 사상을 한국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럽은 다르다. 영화 <데미지> 라든가, 40대~50대의 그런 행위를 연애로 이해한다. 한국 사회는 미성년자 갈취로만 보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영화가 그런 식의 연애 감정이나 관계를 드러내고자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아니어야 하다니?

한국 사회에서 살려면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거야 말로 당위적인 접근 아닌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내가 공인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된다. 작가로서 나는 전염성이 강하고 위험한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심의하는 사람들이 눈치챘다고 생각한다. <사마리아>가 18세 관람 가 판정을 받았다. 비주얼은 별 게 없다. 관념적인 심의를 한 것이다. 행복하게 원조교제를 한다? <데미지>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초기에 한 잡지의 비평 글에 김감독이 격렬하게 반발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는 내가 제도권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저들은 아는 게 많고, 근거를 갖고 말하려니 하는 기대 때문에 더 반발했던 것같다. 이제는 안 그런다. 다만 영화 외에 다른 잣대를 휘두르는 것은 싫다. 그런 점에서 외국 기자나 평단은 편하다. 나에 대한 정보 없이 영화만으로 자유롭게 평하니까.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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