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골목과 공동체 문화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5.04.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개발 사업으로 ‘멸종’ 위기…건축가들 새 공동체 문화 모색
모든 길의 한 끝은 집이다. 길은 마을로 스며들면서 골목으로 바뀌고 골목의 끝인 마당에서 부풀거나 오므라든다. 마당에서는 대문이나 창문이 그러하듯이, 밖(마을 공동체)과 안(가족·개인)이 서로를 거부하지 않고 뒤섞인다. 마당은 위(하늘)와 아래(땅)가 만나는 중성(中性)의 공간이기도 하다.

골목은 집과 길 사이, 개인과 사회 사이에 있다. 대로변 풍경이 그 도시의 초상이라면, 골목길은 그 골목에서 살아가는 개인과 이웃 들의 자화상이라고 말한 건축가도 있다. 사람들은 골목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갈등하고 화해하며, 등을 돌리거나 협력한다. 골목은 그 골목을 품고 있는 공동체의 실핏줄이다.

아파트 문화가 몰고 온 반인간성

그러나 위와 같은 언술은 이제 현재형이 아니다. 골목에 대한 이야기는 거개가 과거 시제 속에 존재한다. 농촌 공동체 문화를 70년대의 산업화와 새마을운동이 파괴했다면, 그것에 의해 여기까지 온 도시 공동체는 도시 재개발 사업에 의해 사라지고 있다. 60년대부터 줄기차게 진행되어 온 근대화 프로젝트는 공간의 재배치였다. 공간의 급속하고 급격한 변화는, 산업화가 지향하는 속도 지상주의와 더불어 인간의 삶의 질을 뒤바꾸었다.

골목과 마당이 있는 주거 형태가 아파트(공동 주택)로 바뀌는 과정에서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근대화가 지향하는 모델이 서구였으므로, 아파트 주거 문화는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선망하는 내용은 전적으로 경제 가치였다. 정부 당국의 주택 보급률 올리기 정책이 부동산 경기와 상승 효과를 일으키면서 아파트는 곧 재산 증식이라는 합의를 공식화했다. 아파트에 건축 개념이 끼여들 틈이 없었다.

지난 연말 국내 처음으로 <공동주택 백서>를 발표한 ‘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건미준)에 따르면, 그동안의 아파트는 대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박스형 건물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단지내 ‘쓸모없는 공간’이 놀이터나 녹지로 쓰였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는 자동차를 위한 공간, 주차장일 뿐이었다. 아파트 공간에는 건축주와 아파트 소유주를 위한 경제적 계산만 가득찼지, 그곳에 사는 사람과 이웃을 위한 배려는 전무했다.

건미준의 <공동주택 백서>는 부동산으로서의 아파트가 아니라, 삶의 질을 개선하는 공간으로서 아파트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라는 건축가들의 절박한 공감대인 것이다.

91년 젊은 건축가들이 참여한 ‘서울 북촌마을 재개발 사업(안)’을 시작으로, 현재 분당에 세워지고 있는 ‘작품 타운’ 그리고 건축가들이 저마다의 작가 정신을 투영하고 있는 소규모 건축물(소규모 공동 주택, 소규모 근린 시설 등)에는 훼손된 공동체 문화를 살리기 위한 방안들이 깃들어 있다.

최근 건축계가 백문기씨(인토건축)의 `대치동 ‘SS(시화)빌딩’을 주목하고, 민현식씨(민현식건축연구소)가 도시개발공사의 임대아파트 현상 설계 공모에 참여한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같은 건축가들의 새로운 시도는 사라지고 있는 골목길·마당·길의 현대적 복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길이나 마당과 같은 공동체 문화의 구제적 장치를 되살리려고 하는 건축가들의 열정 밑바닥에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이 깔려 있다. 한국 현대 건축사는 서구에 대한 맹목적 추구와 국수적 민족주의로 요약된다는 것이다.

‘달동네 순례자’인 백문기씨는 서울 옥수동이나 금호동 달동네를 숱하게 답사하면서 ‘달동네 미학’을 추출해 냈다. 그것은 대화와 교감으로 구성되는 공동체 문화였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그가 보기에 아파트 문화가 비인간적인 이유 중 하나는 공간의 반인간성 때문이다. 자칫 서구 모더니스트들이 극단으로 몰고 갔던 환경결정론(좋은 환경이 좋은 인간을 만든다. 그 역도 가능하다)으로 빠질 우려가 없지 않지만, 백씨의 지적은 적지 않은 설득력이 있다.
“길을 건축화하자”

그러나 골목길 예찬에 대한 경고도 있다. 민현식씨는 “그것이 낭만주의나 복고 취향이라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골목길의 ‘재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민씨에 따르면, 도보나 우마차에 의한 휴먼 스케일이 자동차 스케일로 바뀌면서 건축의 개념도 달라졌다. 건축이 자동차(속도)의 등장으로 간판화했다는 것이다.

공동체 문화, 즉 휴먼 스케일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가 건축가들의 새로운 고민이었다. 건축가들의 답은 ‘길을 건축화하자’는 것이다. 자동차의 출현이 사람과 길을 기계적으로 분리한 것에 대한 반기이다. 민현식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건축을 길로 만들자”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민씨와 백문기씨는 악수하고 있다.

집은 모든 길의 한 끝이지만 거기가 마지막은 아니다. 돌아서면 길의 맨 처음인 것이다. 경제 가치에 따라 추진되어온 근대화는 길의 한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돌아서야 한다고 젊은 건축가들은 말한다.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향해서.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