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가고 싶어하는 인간에 관한 보고서
  • 부산·魯順同 기자 ()
  • 승인 1999.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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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작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큰 인기
‘흥행을 보장하는 안전 장치는 없다. 유일한 안전 장치는, 관객에 대한 믿음과 좋은 작품으로 부응하겠다는 우리의 다짐뿐이다.’ 이창동 감독(45)은 몇달 전 <박하사탕> 촬영에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공법은 으레 고단한 법. 좋은 작품은 관객이 알아본다는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돈을 대겠다고 나서는 투자자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 10월14일 밤, 그의 호언이 허세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부산 수영만에 마련된 야외 극장에서는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는데도,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름 높은 스타도 없고 특별히 새로운 얘기를 펼쳐놓은 것도 아닌데, 그가 이끄는 대로 대책 없이 빨려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 역행 이미지로 기차 이용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단박 이 영화가 쳐놓은 연막을 눈치챈다. 시작부터 기대를 배반하기 때문이다.‘박하사탕’이라는 달콤하고 풋풋한 제목, 이국풍의 깔끔한 포스터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보통 사람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이 얼마나 구차한지, 역사가 개인을 얼마나 촘촘히 얽어매고 있는지 고통스러운 보고가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는, 79∼99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은 40대 이혼남 영호(설경구). 동창생들이 모인 질펀한 야유회장에 불쑥 끼어든 그는, 미친 듯이 <나 어떡해>를 부르다가 철로 위로 올라간다. 알 수 없는 단절음을 내뱉던 그는,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팔을 벌리고 절규한다.‘나, 다시 돌아갈래.’그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하듯, 기차는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가구공장 사장님, 닳아빠진 형사, 어설픈 신출내기 형사,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신병, 그리고 꿈 많은 공단 노동자로 거듭거듭 젊어지는 것이다. 관객은 젊은 영호를 보며,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40대 남자의 회한을 헤아리게 된다.

<초록 물고기>에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심리를 드러내는 이미지로 사용했던 이감독은, 이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시각화하기 위해 기차의 이미지를 빌렸다. 20년에 걸친 시간 역행을 인도하는 것이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기차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기차가 달리면, 차창 밖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것이다. ‘뒤로 가는 시간과 달리는 기차’의 역설은, 마술을 낳았다. 기차가 달리면 철로에 떨어진 꽃잎은 하늘하늘 허공으로 떠오르고, 길 가던 사람들은 뒷걸음질치는 것이다.

기차는 7개의 장(章)을 한데 꿰는 실일 뿐 아니라, 영호의 변화를 지켜보는 목격자이기도 하다. 그가 자살을 포기하고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낼 때, 구차한 일상에 진저리를 치며 집을 빠져나올 때, 그리고 그의 동료 형사가 시위 주동자를 개 패듯 두들겨패고 있을 때 여지없이 기차가 그를 비켜가는 것이다.
기차·박하사탕 따위 상징이 영화를 한데 묶는 실이라면, 구슬은 그가 현실에서 퍼올린 이야기이다. 현실에서 퍼올린 일화의 생생함은, 한 인물 안에 ‘IMF - 87년 6월 - 80년 5월’등 현대사를 응축한 데서 비롯된 부자연스러움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배우가 미치지 않고서는 찍기 어려웠다는 장면을, 관객이 편하게 볼 도리가 없다. 부부 싸움 장면은 신경을 긁어대는 듯 짜증스럽고, 진압군 영호가 얼떨결에 소녀를 죽여놓고 공포에 떨 때 절로 가슴이 옭죈다. 이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는 두 가지 명제에 발을 디디고 있다. 역사는 개인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삶을 구속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이 지킬 수 있는 순결함의 몫이 있다는 것.

<박하사탕>은 ‘가해자도 피해자’라는 얘기를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감독은 “나이를 먹으면서 순수 열정 따위를 잊듯이, 우리 사회도 가치나 이성 대신 돈과 이기심이 그 자리를 메웠다”라고 말했다. 가치의 소중함을 말하자는 것인데, 도덕적인 설교를 늘어놓는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다. 이감독은 우선 냉소와 비관의 편에 선다.

세상이 비웃음받아 마땅한 이유 일러줘

영호는 광주에서 얼결에 소녀를 죽이고, 손에서 피 냄새를 지우지 못한다. 경찰이 되고 난 뒤에는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며 나서는 이들을 비웃고 깔아뭉갠다.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낸 그는, 피의자에게 묻는다. 정말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고. <박하사탕>은 세상이 비웃음을 받아 마땅한 이유, 사람이 보잘것없는 이유, 꿈이 그토록 나약한 이유를 일러주고 나서, 사람과 꿈이 소중한 까닭을 묻는 것이다.

초반에 영호는 이마에 총을 대고 외친다. 혼자 죽자니 억울해서 내 인생을 망가뜨린 놈을 찾았는데, 딱 한 놈만 고르려니 그마저도 어렵더라고. 이감독은 ‘영호가 회한에 차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절규하는 것은, 자신이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호의 다른 길은 첫사랑 순임인데, 그가 보내온 박하사탕으로 상징된다. 처음 피의자를 고문하던 날, 영호는 자신을 찾아온 첫사랑 순임을 외면한다. 80년 5월 출동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임과 어긋났던 그가, 그로부터 5년 뒤 의식적으로 그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손에 가시지 않은 피 냄새(광주에서 저지른 학살의 기억)와 똥 냄새(고문의 흔적) 때문이라도 해도, 어쨌든 자신이 한 선택이다. 그가 그토록 분열적인 이유다.

가지치기 덕분에 더욱 밀도가 높아진 <박하사탕>의 징그러운 리얼리즘은, 영호의 아내 홍자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외도를 하다가 들킨 뒤에도, 식탁 머리에서 울먹이며 가정의 안정을 바라는 기도를 올리는 ‘유연한’인물이다. 홍자 역을 맡은 김여진씨는 “현실에는 많은데 스크린에서는 좀체 찾아보기 어려웠던 인물을 연기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 영화의 절제력과 짜임새는, 감독으로서는 신인이되 이미 중견 작가인 그의 이력을 감안하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사회학적 보고서가 아님을 애써 강조했다.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회한에 찬 욕망에 관한 영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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