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문화]프랑스 문단의 왕성한 ‘생식력’
  • 파리·高宗錫 편집위원 ()
  • 승인 1997.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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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 63명 장편 소설로 데뷔…여성 작가 강세, 수준 높은 신인 많아
파리의 올 여름은 예년과 달리 흐린 날이 거의 없었다. 카톨릭 청소년 축전 참가자를 비롯한 관광객들에게 ‘맑은 하늘과 무더운 날씨의 파리’라는 다소 그릇된 인상을 심어준 청명혹서(淸明酷暑)의 8월이 지나며 긴 방학이 끝났다. 학생도 정치인도 활동을 재개했고, 단편 추리 소설과 만화로 납량 특집을 꾸미며 부피가 얇아졌던 시사 잡지와 신문 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리의 문학이 개학을 맞았다.

프랑스의 신간 소설들은 8월 말∼9월 초에 쏟아져 나온다. 그러니까 파리의 ‘문학 연도’는 가을에 시작하는 셈이다. 11월을 전후해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작들이 정해지면서 그 문학의 개학은 절정을 이룬다.

데뷔 작가 대부분 출판·언론·교육계 출신

그 문학의 개학에서 저널리즘이나 평단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신입생들, 즉 데뷔 작가들이다. 물론 오늘날의 프랑스 문단은 장르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작가라고 말할 때 ‘작가’란 대체로 장편 소설을 쓰는 사람을 뜻한다. 물론 그것은 프랑스만의 현상이라기보다는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집이 거의 출간되지 않고 단편 소설이 고급스러운 문학 잡지의 호의에 기대어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동안, 장편 소설은 몽테뉴 이래 프랑스 득의(得意)의 장르인 에세이와 함께 프랑스 문학 시장을 복점(複占)하고 있다.

올 가을에 프랑스에서 처녀 장편을 출간했거나 출간할 사람은 63명이다. 새로운 작가가 63명 탄생하는 것이다. 올해의 처녀 장편 63편은 프랑스 문학이 사상 최고로 다산한 지난해의 75편에 견주면 다소 줄어든 것이지만, 95년의 50편, 94년의 34편에 견주면 평년작 이상은 거둔 셈이다. 데뷔 작가의 수가 문학의 생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단 프랑스 문학이 왕성한 생식력을 보이고 있다는 증거는 되는 셈이다. 지난해 콩쿠르상이 파스칼 로즈의 처녀 장편 <제로 전투기>에 수여되었음을 생각하면, 올해 데뷔한 작가들 가운데서도 두 달쯤 뒤에 이 ‘명예와 돈의 전당’으로 입성하는 사람이 나올지 모른다. 직업 별로 보면 이들이 대체로 출판·언론·교육 분야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도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나 지구화 이데올로기 따위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서방 국가가 프랑스이기는 하지만, 표피적으로나마 나라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프랑스 문학의 전통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 바탕에는 제국주의·식민주의 국가로서 프랑스의 과거가 분명히 깔려 있고, 가장 진보적인 작가들조차 자기들의 조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허위 의식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했겠지만, 예컨대 앙드레 말로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몇몇 장편은 아시아의 역사와 민중을 프랑스 문학사에 끌어들이며, 그것들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 이미지들이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와 메아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주목되는 여성 소설가들의 작품 세계

말로나 뒤라스의 아시아 소설을 잇고 있는 것이 나딘 라포르트의 처녀 장편 <상하이 풍경 100개>이다. 작가 자신의 중국 체험이 반영되었다는 이 소설은, 공산주의 교본의 선명한 가르침보다는 서예의 모호한 신비를 더 사랑하는 ‘왕(王)’이라는 화가를 그 중심에 두고 있지만, 표제가 가리키듯 한 개인의 일대기라기보다는 80년대 중국의 풍경을 만다라로 그려놓았다.

유배와 투옥으로 점철된 삶을 상해의 한 감옥에서 자살로 마감하는 왕의 동선(動線)을 따라, 또는 그 바깥에서, 중국의 과거와 현재가, 공산주의적 선전 선동과 천안문 사건의 다이내미즘이, 혁명의 퇴락과 종교의 안분(安分)이 길항하거나 교직되고 있다. 이 여성 작가가 빚어낸 주인공은, 예컨대 30년대의 말로가 그려낸 주인공들보다 더 정적이고 내면적이지만, 그 주인공들의 삶을 차갑게 더듬고 있는 중국은 반 세기 넘어 변한 것만큼이나 변하지 않았다.

엘리즈 퐁트나유의 처녀 장편 <지우는 여자>의 주인공도 아시아 여자다. 그러나 그는 파리에 산다. 그가 파리에 산다는 말은 어찌 보면 옳지 않다. 그는 꿈 속에서 산다. 죄디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프랑스 가정에 입양된 네팔 여자다. 그는 파리의 터키탕에서 자기 몸의 때를 벗긴다. 그 때는 네팔의 때고 유년기의 때다. 그는 그 때를 벗고 파리의 현대적 삶에 적응해야 한다. 때를 벗는 것은 지우는 것이다. 그가 지우는 것은 과거다. 네팔에서의 과거다.

그러나 그 지우는 과정은 또 풀어놓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셰르파였던 생모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는 히말라야 빙하의 크레바스가 삼켜 버린 개미를 생각한다. 그가 천천히 여는 기억의 서랍에는 네팔의 자연과 사람 들이 담겨 있고, 그것을 꺼내는 그의 몽상은 지우는 과정이면서 살리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가 지우는 것은 네팔에서의 과거가 아니라 파리에서의 현재인지도 모른다.

이들 두 작가말고도 이번 가을 문학 저널리즘이 주목하는 등단 작가들 가운데는 여성이 많다. <쓴맛>의 작가 엘리자베트 엔베르, <공룡 시대 빛의 찬가>의 작가 비르지니 루, <피아노 의자>의 작가 마갈리 데클로조, <퇴짜>의 작가 실비 마통, <그 해 여름>의 작가 아나 깁송, <베일, 얼굴, 영혼>의 작가 엘렌 로랑 같은 이들이 그 사람들이다.
<쓴맛>은 고향을 찾지 않는 뱃사람과 그가 버린 다섯 여자, 그리고 그 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는 스코틀랜드 억만장자의 이야기다. ‘보물섬’의 환상을 찾아 떠나버린 남자들이 비워놓은 그들의 고향에서 이방인 억만장자는 여자들에게 헨델의 <메시아>를 가르치며 내면의 낙원을 건설한다.

<피아노 의자>의 주인공은 페튈라라는 여자아이와 올리비에라는 남자아이다. 19세기식 의자에 앉아 피아노 치기를 좋아하는 사팔뜨기 페튈라와, 돌려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며 직설적으로 얘기하기를 즐기는 이탈리아 출신 올리비에, 그리고 그들 가족의 가난하지만 활기찬 삶이 <피아노 의자>의 소재다.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 반드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라는 법은 없지만, 다른 처녀 장편 네 편은 여성의 삶을 흔들어놓은 비극적 사건이나 열정의 기록이다. <공룡시대 빛의 찬가>는 한 탈옥수가 파탄시킨 어느 여성의 삶에 대한 기록이고, <퇴짜>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그에게 받아들여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베일, 얼굴, 영혼>은 교통 사고로 얼굴이 엉망이 된 여성이 새 얼굴을 갖고 싶어하는 열망을, 강간당해 임신하고 생매장되었으나 살아난 고대 이집트 여성 젤다의 삶과 중첩시키고 있다. 또 <그 해 여름>은 라코르뇌브라는 지방의 8월을 배경으로 한 여성의 일시적 열정과 꿈과 일상을 아름다운 자연 속에 배치했다.

주목되는 등단 작가들 가운데 여성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모처(某處)>의 작가 레몽 보지에, <자석(磁石)의 삶>을 쓴 장 위베르 가요, <방>의 작가 크리스티앙 가나쇼 등은 비록 올해 데뷔하기는 했지만, 솜씨는 중견급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가이다.

레몽 보지에의 <모처>에서 ‘모처’란 돼지우리다. 소설의 화자는 돼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또는 사람에 의해서 야기되는 사랑·미움·굴욕·살육 따위를 세세히 보고한다. 그 풍경은 돼지의 풍경이지만 사람의 풍경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 <자석의 삶>은 훔친 볼보 자동차를 타고 바캉스를 떠나는 17세 소년 톰의 모험 기록이고, <방>은 세계의 부존재, 즉 죽음에 대한 소설적 탐구다. 거기서 방이란 가스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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