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디오로 그린 ‘20세기 만다라’
  • 경북 경주·成宇濟 기자 ()
  • 승인 1997.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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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기展>/고대 인도 문양에 포르노 화면 삽입해 새 이미지 창조
‘20세기에 되살아난 만다라’. 경주 선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현기 展>(8월23일~9월30일·0561-745-7075) 전시장을 들어서면 순간적으로 갖게 되는 느낌이다.

대형 스크린에 영상으로 투사된‘그림’에는 고대 인도의 만다라와 현대적 이미지가 뒤섞여 쉴새없이 움직인다. 평면 위에 고정되어 있는 고대 인도의 만다라와 달리 박현기 식의 만다라는 빠르게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숨가쁜 소리를 동반한다. 고대와 현대의 이미지가 한 화면에서 교차하고 부딪쳐서 제3의 강력한 이미지를 창출하면서 20세기 식 만다라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다라 시리즈>는 지난 20년간 박현기씨 (55)가 진행해온‘비디오 설치’의 결정체이다. 작품 내용도 내용이지만, 선재미술관이 초대해 이루어진 이번 전시는 박씨가 국내외에서 열어온 수십 차례 개인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7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비디오를 캔버스 삼아 작업해온 박씨가 20년 동안 일구어온 결실을 보여주는 전시회인 것이다.

‘박현기의 이력은 한국 비디오 아트의 역사’라고 평가되고 있으나, 그 평가는 설치 미술과 비디오 아트가 크게 유행한 90년대 들어서야 이루어졌다. 동료도 없이 고독하게 이루어진 그의 작업은 초창기에는 그만큼 외롭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었다. 백남준씨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국내에 소개된 84년 이후에야 비디오 아트가‘아트’로 대접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작업 개념”

70년대 중반, 당시로서는 첨단 기기였던 비디오를 표현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박씨의 작품은 언제나 정적이었다.‘비디오 설치’라고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최첨단 장비가 뿜어내는 현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탑처럼 쌓아올린 돌들 사이에 텔레비전 모니터를 하나 끼우고 쌓아올린 돌과 똑같은 돌을 화면에 비추는가 하면, 돌과 나무와 텔레비전이 어울려 독특한 형상을 만들고 바로 그 형상을 작품 속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하게 하는 등 박씨의 작품은 냉정할 정도로 고요했다. 이같은 작업들은 국내보다는 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80년 파리 비엔날레 같은 외국 전시에서 각광을 받았다.

그가 비디오 설치 작업을 통해 천착해온 개념은‘실재’와‘허구’의 대비이다. “나에게는 작업 개념이 중요할 뿐 표현 도구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그는 말했다.

79년 그는 낙동강 강물에 대형 거울을 꽂았다. 강물은 거울 아래로 흘렀고, 거울에는 흐르는 강물이 비쳤다. 그리고 거울 바로 앞에는 거울이 되비친 강물이 또 흘렀다. 실재와 허구의 강물을 동시에 보여주었던 이 작품은, 도구보다는 개념을 더 중요시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비디오는 그의 문제 의식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수단이었을 뿐,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작가는 인터뷰 도중 “나는 참 이중적이다”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형식 면에서 국내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작업을 해왔으면서도, 그의 관심은 언제나 전통에 가 있다.

60년대 중반 대학(홍익대 회화과 수료·건축과 졸업) 공부를 마친 뒤 바로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4·19세대로서 전통 문화를 마치 미신처럼 타파하던 시기에 교육을 받았던 그는 “내가 서양식 교육의 실험용 쥐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 자각이 그로 하여금‘문화의 중심지’라는 서울을 등지게 했고, 오늘날까지 대구를 떠나지 않고 작업을 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대구에 내려갈 때만 해도 그 지역에는 정신적·물질적 전통을 숨쉴 수 있는 분위기가 살아 있었다.

박씨는 지난 3년 동안 전력 투구해온 <만다라 시리즈>를 올해 들어 표현 방법을 조금씩 바꾸어가며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지난 6월 죽산국제예술제에서는 야외 공간에 설치한 대형 화면에 만다라 영상을 처음으로 쏘았고, 지난 7월 뉴욕의 킴포스터 갤러리에서 백남준·문 범·전광영 씨와 함께한 전시에서는 이 영상을 대형 접시 위에 담아 눈길을 모았다.

선재미술관 전시에서는 미술관에 설치된 초대형 화면(너비 5m40cm, 높이 4m) 8개와 바닥에서 박씨의 만다라 영상이 펼쳐진다. 고대 인도의 만다라와 함께 나타나는 현대의 영상 자료는 포르노이다. 남녀가 교접하거나 합일하는 모습이 수천 년 시차를 두고 번갈아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현대의 포르노 형상은 고대 만다라의 기하학적인 구도에 갇혀 있다. 81개로 구획된 작은 화면 위에 포르노 영상은 잘디 잘게 쪼개져 등장하고, 포르노들의 조합은 고대 만다라 형상들과 뒤섞인다. 그 사이사이에 기하학 도형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한다.

‘혼돈의 세계’는 곧 현대인의 내면

고대와 현대의 화면을 서로 만나게 한 작가는 그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만다라를 자꾸 보면 기하학 이미지가 가장 먼저 잡힌다. 그 구도에 오늘의 현실을 끼워넣었다. 예전의 도식에 현대적인 형상을 끼워넣으면 색다른 이미지가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다라 시리즈>는 고대와 현대의 두 이미지가 빠른 속도로 충돌하면서 새롭게 형성하는 제3의 이미지로서 보는 이의 시선을 순식간에 빨아들인다. 제3의 이미지는, 작가가 자기를 표현할 때 흔히 말하는 이중성, 곧 고대(전통)와 현대를 한몸에 안고 있는 현대인들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프랑스 출신 미술 평론가 마야 다미아노비크는 박씨의 뉴욕 전시 도록에서 ‘만다라의 그 흔들림은 우리의 지각과 판단과 감각을 휘저어 놓는다. 우리는 작품 내면의 역동성에 거의 물리적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라고 평했다.

작가가‘혼돈의 세계’라고 소개하는 <만다라 시리즈>와는 달리, 이번 개인전에서 함께 전시되는 <물 시리즈>는 더없이 고요한‘명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무덤의 상석과도 같은 12개의 돌 위에 조용하게 물이 흐른다. 영상으로 비치는 물의 흐름은 돌마다 제각각이지만, 전체가 하나로 모여 편안하게 화합하는 형상을 만든다. 이리하여 한 전시 공간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실 세계와,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가 공존한다.

지난 20년 동안 표현 방법을 수없이 달리해 온 박씨는 오는 11월 중순 미국 하트포드 대학에 있는 조세로프 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다시 전시한다. “<만다라 시리즈>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다. 또 금방 싫증이 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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