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예술론’을 비판한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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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오병욱씨, “민족 정서로 포장된 식민주의 미학일 뿐”
“한국의 미술은 언제나 담담하다. 다채롭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그다지 슬플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덤덤한 매무새가 한국 미술의 마음씨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최순우씨(작고)는 자신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에서 우리 미술에 대해 위와 같은 총평을 남겼다. 그런데 어딘지 낯익다. 일본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99~1961)가 80년 전에 정의한 ‘조선의 미’에 뿌리를 둔 감상이기 때문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국내에 근대 미술사 방법론을 전파한 인물로 통한다.

“야나기의 공적이 도대체 뭡니까?” 화가 오병욱씨(46·동국대 예술대 교수)의 말이다. 그동안 국내 미술사학계에서 야나기가 끼친 공과를 놓고 논쟁한 적은 많았다. 하지만 오교수만큼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이는 없었다. 그는 최근 발간된 한국미술이론학회지 <미술 이론과 현장> 창간호에 논문 <한국적 미에 대한 오해-류종열·고유섭·윤희순의 논고 비교 분석>을 발표하고, 야나기 무네요시와 그의 영향을 받은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을 맹타했다.

<한민족과 그 예술>(송건호 옮김, 탐구당)에서 ‘예술은 민족의 마음의 표현이다’라고 정의한 야나기는, 조선 예술의 성격을 규정짓기 위해 중국·일본과 조선을 비교했다. 그리고 ‘침략에 시달리고 동요와 불안과 고민과 슬픔이 깃든’ 사람들과 ‘산은 메마르고 나무는 띄엄띄엄 서 있는’ 산하를 발견해냈다.

이어 조선 백자, 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지붕 선, 일본 호류지의 백제관음상, 경주 석굴암 등을 돌아본 뒤 ‘애상미’ ‘소박미’ ‘단순미’ 따위 용어를 통해 조선의 미를 설명했다. ‘중국 예술이 의지의 예술이고 일본이 정취의 예술이라면 조선은 비애의 예술이다’라거나 ‘중국은 형(形)의 예술, 일본은 색의 예술, 조선은 선의 예술’ 같은 정의도 이때 나왔다.

야나기 민예론, 국내 학자들도 답습

오병욱 교수는 나아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학 방법론이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서양의 역사결정론적 시각과 만나며, 이는 결국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으로 변형될 수밖에 없음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오교수가 발견해낸 인물이 19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자 이폴리트 텐이다.

텐은 유럽 민족을 라틴계(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포르투칼)와 게르만계(독일·벨기에·네덜란드·영국·스웨던·미국)로 나누고 4백여 년에 걸친 작품 경향을 분석한 뒤, 종족과 민족에 따라 예술의 성격이 사실적이거나 데생적, 혹은 색채적으로 갈린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텐의 이론은 당시 유럽에서 꽤 인기를 끌었고, 유럽의 방법론을 급속히 받아들이던 일본 지식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오교수의 설명이다. 하지만 풍부한 자료를 섭렵했던 텐과 달리 야나기 무네요시는 도자기 등 한정된 작품의 단편적인 인상에만 의지해 조선의 예술은 물론 민족성까지 규정하는 오만함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야나기가 정의한 조선의 미나 ‘민예론’은 뒤집어 보면 유치함·고루함·비참함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오교수는 말했다. 야나기는 일제의 무단 통치를 보완한 문화적 식민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나기의 접근법이 국내에서 별 저항 없이 수용되고 자기 복제하는 데 성공한 이유는 뭘까? 오교수에 따르면, 그가 조선의 친구를 자청한 박애주의자이자 섬세한 양심을 가진 지식인으로 국내에 비쳤기 때문이다.

야나기의 조선예술론은 고유섭에 의해 ‘구수한 큰 맛’ ‘무관심성’ ‘무기교의 기교’ 따위 용어로 뿌리를 내린 이후 최순우·김원룡·이동주·황수영·진홍섭 등 국내의 대표적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이같은 ‘야나기 최면 효과’는 학계를 뛰어넘어 문화 전반과 일상 생활에까지 민족 정서로 포장된 채 유포되었다. 신석초 시인이 제기한 이른바 ‘멋론’에서도 야나기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백의민족도 야나기가 쓰기 시작한 말이다.

그러는 사이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은 일종의 성역으로 자리 잡았다. 김지하 시인 등이 인상 비평 차원의 비판을 남겼을 뿐 미술계 내부에서 제대로 된 야나기 비판이 나온 적은 거의 없다. 국내 미술사학계가 학맥이나 인맥으로 얽혀 있어서 조심스러워하거나 비판을 회피한 탓도 크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야나기식 방법론이 비판 대상으로 오르내린 지 오래되었다. 1997년 가을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세계적인 문학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미와 지배’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야나기의 시각은, 식민 지배자가 자신들이 멸망시키려는 민족을 향한 동정의 시각에서 비롯된 독단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오교수의 논문은 이제 국내에서도 인상 비평을 넘어서, 문화 사회학적 측면에서 야나기식 관점을 재고해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오교수는 “인상주의 이후, 특히 20세기 이후 미술에서 민족성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야나기식 시각으로 한국미를 재단하는 이들이 많아 이번 논문을 쓰게 됐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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