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 무주에 싹튼 예술인 생태마을
  • 전북 무주·李文宰 기자 ()
  • 승인 1997.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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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천리에 ‘흙 건축 마을’ 건설…환경 걱정하는 예술인들 주축

국내 처음으로 생태 마을이 선다. 내년 봄, 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산기슭에 세워질 무수동 예술인 마을은 지구와 생명의 위기에 특히 민감한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자발적으로 청사진을 만들고, 지역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문화 생산 기지로 뿌리 내릴 계획이어서 눈길을 모으고 있다. 왜곡되어 있는 이 땅의 공간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구성된 ‘공간 정의 실천 협의회’(공정협) 준비 모임의 첫 작품이 될 이 예술인 마을은, 최근 한창 뜨거워지고 있는 생태 마을 논의, 지방자치단체의 지역 문화 특성화 계획, 도시인들의 U턴(귀농) 현상, 새로운 공동체 문화 모색 등과 맞물리면서 지속 가능한 삶과 문화를 앞당기는 하나의 모델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공정협 준비 모임은 건축가 정기용(기용건축 소장)·영화감독 이장호·조명래(단국대 교수·지역개발)·성완경(인하대 교수·미술평론가)·강내희(중앙대 교수·영문학)·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미술평론)·조혜정(연세대 교수·사회학)·이선복(서울대 교수·고고학)·최윤(소설가)·장의균(<민족예술> 주간) 씨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무수동 예술인 마을 건설이 ‘개발과 독점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 땅에 공간 정의를 실천하는 한 표본’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태양열 이용…쓰레기는 원천 봉쇄

동북쪽으로 덕유산과 분지인 안성벌이 한눈에 들어오는 무수동 예술인 마을 부지는 원래 마을이 공동으로 소유했던 임야. 신선들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경관이 수려하다. 공정협은 현재 2만9천 평을 부지로 확보하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 공정협 장의균씨에 의하면, 새마을 운동 당시 일본에 연수를 다녀왔던 김종호 전 농협 조합장의 ‘깨인 의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자연의 나라’로 불리는 무주군에서도 안성벌은 특히 개발이 거의 안되어 생태를 테마로 한 예술인 마을의 적지로 판단하고 있던 공정협에게 김씨가 ‘그런 마을이라면 우리 동네에 와서 만들라’고 나섰다는 것이다.

예술인 마을 부지는 7백 평 크기 저수지(구름샘)를 중심으로 들어서는데, 공정협은 이 저수지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계곡물을 담지 않고 스스로 샘을 갖고 있는 이 저수지를 생태 및 문화예술 기지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혹독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인 이 저수지에서 흘러나간 물(친환경적 문화 정책)이 안성면과 무주군은 물론 전국과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 기대는 실현 가능해 보인다.

예술인 마을 설계를 총지휘하고 있는 정기용 소장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그것도 민간 차원에서 세워지는 이 마을에 대한 외부의 선입견을 다음과 같이 부정한다. 이 마을은 ‘특수층의 배타적인 호사취미’가 아니고 ‘생태를 테마로 한 흙 건축 마을’이라고 규정하는 정소장은, 이 마을이 공간 정의를 실현하는 한 모델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진지한 실험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인 마을의 설계도는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우선 마을에 들어서는 건축물은 모두 흙을 재료로 한다. 건축 자체가 생태계를 지배하거나 위반하지 않는 것이다. 흙을 파고 메우는 공사를 자제하면서 자연을 최대한 보존한다. 여름과 겨울의 빛과 공기 흐름을 면밀하게 관찰해 마을을 배치한다. 태양열을 사용하되 기계적 장치보다 추녀 같은 전통 가옥 구조를 응용해 건축적 장치로 최대한 이용한다. 물과 에너지의 사용을 최소화한다. 쓰레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특히 화장실에 유기물을 투입해 자체적으로 분해되도록 한다. 저수지와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에 습지를 조성해 한번 정화된 하수가 다시 자연 정화되도록 한다.
지역 발전 정책, 무주군에 제시하기도

예술인 마을에는 소유와 공유, 그리고 향유 개념이 들어가 있다. 대전과 전주 지역 등지로 출퇴근이 가능하고 지역 문화 발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상주하고, 창작과 연구 및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정책을 제공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이 마을에 들어간다. 컨벤션 센터나 야외 음악당 같은 공공 시설물과 이 마을 자체가 향유할 대상이다. “예술인 마을은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라고 정기용 소장은 말했다. 예술인 마을이 디디고 있는 현실이 바로 지역 현실이다. 작게는 안성면과 무주군, 크게는 한국과 세계와 연계되는 마을인 것이다.

무수동 예술인 마을은 미래 공동체 문화를 위한 실험 공간이 되고자 한다. 현재 농촌은 이미 공동체가 아니다. 농업이 궤멸하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세계 제일의 인구밀도가 말해주듯 이 땅의 대도시는 인간을 위한 정주 공간이 아니다. 공정협은 이 마을에서 도시와 농촌,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모듬살이의 원칙들을 재점검할 참이다.

지난 11월21일 무주군청에서 열린 간담회는 ‘무수동 저수지 물이 마을 밖으로 흘러나간’ 좋은 예였다. 김세웅 무주군수가 초청하고 민족예술인 총연합회가 주관한 이 간담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공정협 소속 회원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무주군은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위한 주요 사업 계획을 보고했고,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제언이 있었다. 김세웅 군수에 따르면, 무주군은 무주리조트로 대표되는 개발지상주의와 천연기념물인 반딧불이로 상징되는 환경 보존 정책 사이에서 21세기를 전망하고 있다.

신라 문화와 백제 문화가 교차하고 백두대간이 관통하며, 경부 고속전철과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 건설로 접근하기가 한결 쉬워진 무주군의 사업 계획에 대해 이장호 감독은 “무엇보다도 문화에 대한 디자인 개념이 시급하다”라고 제안했다. 무주 주민들이 무주의 자연과 문화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련된 방법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기용 소장은 청정한 자연 환경 자체가 새로운 자본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절실하며, 문화 인프라를 구축할 때 풍수박물관처럼 ‘한국에서도 필요하고 세계에서도 필요로 하는 아이템’을 기획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화가 임옥상씨는 규모만 커다란 문화 인프라는 그 효과가 전무하다면서 무엇보다도 전문 인력과 소프트 웨어를 개발하고 운용할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수동 예술인 마을의 앞날은 밝아 보인다. 2년 전 안성면으로 이주해 생태 농업을 모색하고 있는 허병섭 목사에 따르면, 최근 젊은이들의 귀농이 부쩍 늘고 있다. 흙 건축으로 마을회관을 짓고 있는 안성면 진도리 주민들처럼 지역 사회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어 환경 및 생태 운동에 마음을 열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들이 서로 유기적인 연결망을 갖는다면 지속 가능한 삶과 문화는 더 가까워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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