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미륵-운주사 천불천탑의 용화세계>
  • 주강현 (경희대 강사·민속학) ()
  • 승인 1997.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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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천불동에 대한 저자의 예술관과 사진을 모은 <미륵…>은 우리 문화 유산에 대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시각을 펼쳐보임으로써 우리 눈까지 열어주고 있다.”
석가모니 불타가 2천5백년 전에 중생을 제도했다면 불타는 미래의 희망을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솔천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 제도를 행할 삼회(三會)를 기다리는 ‘마스터 플랜’이 그것이다.

그 미래불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현현했을까. 목이 잘린 불상, 혹은 몸은 없고 목만 남은 불상, 시대를 알 수 없이 어느날 갑자기 밭을 가는데 나온 불상, 더 나아가 불상은커녕 단순한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 바위, 그이들을 우리는 미륵이라고 부른다. 80년대의 논객과 호사가 들에 이르기까지 미륵은 천 년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요헨 힐트만, 예술가이자 예술이론가, 70년 이래로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현대 예술과 철학에 관한 많은 평론과 실험적인 비디오 영화 작업, 사진 작업, 조각에까지 관심이 미친 그이도 이제 막 도솔천을 건너고 있다. 기쁜 일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운주사에 대한 사진과 자신의 예술관을 모아 펴낸 <미륵­한국의 성스러운 돌>이 한국어판을 얻었다.

나는 몇 가지 점에서 그이에게 경의를 표한다. 한국 문화의 국제화에 공을 끼쳤다는 식의 상투성이 아니다. 관광유적지가 아니라 ‘버려진 땅’을 찾는 정공법을 택했다는 점이다. 김지하로부터 송기숙·황석영 같은 인물들이 마땅히 그의 책에 등장하고 있으며, 전남대 이태호 교수에 의해 ‘한 유럽인 예술가의 전생 찾기’라는 한국어판 발문도 얻고 있다.

‘천불동은 하나의 질서를 보여주는 곳’

그이는 자신의 표현대로 ‘전생이 한국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이는, 우리의 민중이 미륵을 기다리는 용화세계의 얽히고 설킨 ‘장식적 성격’임을 간파하고 있다. ‘직선의 역사’가 아닌 ‘장식의 성격’이라는 데 나는 선뜻 동의하고 만다. 그래서 목만 남은 미륵조차 꿈꾸고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구미 과학의 태생적 한계에 관한 그의 지적은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구미인이라면 의당 생각해 보아야 할 화두가 아닌가. 그는 입석과 풍수, 심지어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이 생전에 말한 ‘은진미륵과 쥐서방 이야기’의 담론에까지 관심을 뻗쳤다.

그는 ‘천불동은 나를 감동시킨다. 현대의 어떤 예술 작품도 그만큼 나를 감동시키지는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에게 미륵 석불은 각각 하나의 기호이고, 천불동은 하나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다가오고 있다. 왜 구미인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그 벅찬 희망 읽기를 우리의 예술가들은 아직도 덜 깨닫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독파한 후에 두 권을 더 샀다. 지극히 완고할 정도로 서양 문화에 길든 사람을 두 분만 뽑아서 선물하려는 짓궂은 심보였다. 구미인들이 동양적인 것에 매료되고 재충전 자양분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왜 우리는 여전히 서양 것 앞에서 작아지기만 하는가. 아, 힐트만의 미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우리들 문화의 단물만 빼갈 속셈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우리들이 미처 보지 못한 시각들, 이를테면 그이의 엿보기를 통하여 우리들의 눈도 열리고 있다.

책에 대한 불만이 없느냐 묻는다면,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하필 운주사가 남도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80년대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촉발했음이 분명하다. 와불이 못내 서지 못하고 누워 있는데 언젠가는 일어선다는 믿음 속에 바로 광주의 역사가 비켜 갔으며, 많은 작가·예술가가 그곳을 찾아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운주사를 마음껏 해석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자유이기는 하나, 좀더 섬세하게 배려한다면 그렇듯 낭만적으로만 모든 것이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고 만다.

나 자신 <마을로 간 미륵>에서 썼듯이, 미륵의 민중성이 특정 지역적 거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지전 형태로 잠복되어 있는 것임을 주목한다면, 운주사만 부각되는 것은 일견 편향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운주사의 잠재적 민중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외국인 필자의 눈에 비친 ‘감동의 드라마’가 손상될 이유도 전혀 없을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이만한 깊이의 우리 문화 성찰을 보여주었는데, 정작 올해를 ‘문화유산의 해’라고 지정한 우리는 어느 정도 깊이의 성찰을 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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