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외국인이 쓴 '조선' 오늘에 되살리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6.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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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씨 <서양인이 본 조선-조선관계 서양서지>/1655~1949년 기록, 원서 2백87권 정리
 
이것은 ‘사건’이다.‘한국학 연구의 사건’이자 ‘출판계의 사건’. 한 개인이 15년이 넘는 세월을 바친 집념의 결실이고, 국가나 기관이 아닌 한 개인이 이루어낸 성과물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이 작업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고서점 호산방 주인 박대헌씨(43)가 펴낸 천 쪽 분량의 <서양인이 본 조선-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전 2권). 3백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조선과 직간접으로 접촉한 서양인들이, 조선의 다양한 모습을 그들의 시각으로 저술한 단행본을 집대성한 것이다. 1655~1949년 서양에서 출간된 서양서 1백88종 2백61판본 2백87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저자가 원전들을 모두 모아 그것을 바탕으로 서지 작업을 했다는 점이다. 이 원전들은 서양에서 발간된 한국학 관련 희귀 도서인데, 그 수량으로 따지면 미국 의회도서관 못지 않다.

그동안 서양인이 쓴 조선 관련 서적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하멜의 <조선여행기> 등 모두 43종 62판본이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소개된 43종 가운데서도 부분 번역이 40% 이상을 차지해, 조선을 바라본 서구의 전반적인 시각을 확인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었다.

 
한국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


서지는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출발점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한 연구 대상이 그 이전에 어떻게 조명되었으며, 어떤 관련 자료가 있는가를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한다. 어느 시대에 어떤 내용의 책이 어떻게 나왔는가를 종합해 밝히는 일은 모든 관련 학문에 기초를 닦아주는 작업이다. 더구나 자료들이 희귀본이라면 그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서양인들이 기록한 우리의 역사적 사실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자 민족 문화의 자산이라고 평가된다. 우리 선조들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당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주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이 땅의 역사를 제3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연구되었는가 하는 것은 서양 접촉사와 관련해 큰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본서가 한국학 연구에 작은 길잡이로 기억될 수 있다면 영광으로 생각하겠다’라고 밝혔다. 관련 학자들이 이 자료를 활용하고 그 성과가 핵 분열하듯 퍼져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저자를 ‘오로지 책에만 매달려 치열하게 살아온 기인’이라고 소개한 신복룡 교수(건국대·정치외교학)는 그를 ‘서지학자라 불러줌으로써 그를 위로할 수밖에 없다’라고 추천의 말에 적어 놓았다.

서지학자 박대헌씨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양 여러 나라를 수소문해 돌아다니며 때로는 개인 소장가를 통해, 때로는 경매를 통해 한 권씩 한 권씩 책을 모았다. 책 한 권 값이 자동차 가격과 맞먹는 것도 있었다. 그 책과 관련된 국내 참고 문헌도 샅샅이 뒤졌다. <서양인이 본 조선…>을 하나의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책의 4배가 넘는 원전을 모두 구입해 집필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구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에 실린 1백88종 2백61판본 2백87책의 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소개되고 있다.

책 제목 아래 표지가 컬러 사진으로 나오고 저자·역자 이름, 출판사, 출판 지역, 출간 연도, 판수, 책수, 면수, 크기, 흑백과 컬러로 분리된 사진과 삽화의 수 등이 그 뒤를 잇는다. 그 다음에는 간략한 해제가 붙어 있는데, 저자의 인적 사항과 책 내용이 소개된다. 해제에는 국내에서 그동안 소개·연구된 자료들이 주석으로 소상하게 붙어 있다.

 
그 다음 장에는 각 책에 들어 있는 목차와 삽화 목록, 그리고 사진과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목차에는 17~20세기에 이르는 영어 불어 독어 네덜란드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등이 원어 그대로 고스란히 실려 있다. 이 자료들만 보면 원전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목차 때문에 스무 번이나 교정을 보았다.

저자는 <서양인이 본 조선…>의 시대를 모두 4기로 나누어 소개했다. 1592년 임진왜란 이전까지를 태동기, 1592~1876년 조일수호조규까지를 초기 접촉기, 1876~1905년 한일협상조약까지를 개화기, 그리고 1905~1949년을 최근기로 분류했다. 이 가운데 최근기의 서적이 1백33판으로 가장 많다. 수집·연구 대상을 49년으로 마감한 이유를, 저자는 ‘50년 이후 자료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조선의 지리·문예·역사·경제 등 총망라

<서양인이 본 조선…>이 수록한 자료에 따르면, 한반도와 서방 세계와의 접촉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를 이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등 4종의 책에 고려와 조선의 존재가 미미하게나마 소개되어 있다.

초기 접촉기에 접어들어 조선을 알리는 책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에 표류해 13년간 살다 간 네덜란드인 하멜의 <조선 여행기>(1668)이다. 이 책자가 나온 이후 ‘조선을 공포의 나라’로 생각한 서양인들은 1세기가 넘도록 조선을 찾지 않았다. 그동안에는 조선 주변을 둘러본 탐험가들의 항해기가 발간되었을 뿐이다.

<서양인이 본 조선…>이 수록한 첫 책은 이탈리아 예수회 소속 신부로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한 마르티노 마르티니오의 <중국지도첩>이다. 165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이 책은 지도에서 조선을 ‘Corea’로 표기하고 조선 8도를 중국식 발음으로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다.

 
<중국지도첩> 이후에 탐험가·선교사·군인·학자·기자·상인 들이 조선의 사정을 서방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쓴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자가 분류한 출간 현황에 따르면, 책 내용은 안내 여행 항해 역사 지리 지도 문예 정치 종교 어학 종군취재 과학 공예 미술 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독일 의사로서 일본에 머무르며 연구 활동을 한 지볼트는 <일본동물지>(1838)에서 조선의 파충류를 마흔여덟 가지 한글 이름으로 소개했으며, 유태계 독일 상인 오페르는 세 차례에 걸친 조선 항해를 통해 조선의 전반적인 문화를 <조선기행>(1880)에 기록했다. 이 책은 ‘아시아 민족 중 조선 사람보다 음악에 대하여 열렬한 애호심을 가진 민족은 없을 것이다’와 같은 19세기 중엽 우리 민족의 성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기록들을 담고 있다.

<서양인이 본 조선…>은 조선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자국 청소년에게 알린 책자들도 소개했다. 영국인 A.허버트가 저술한 <조선에서 한 소녀가 겪은 모험>(1927)도 그 중 하나이다. 저자가 구분한 최근기에 이를수록 동물학·민담·종교·기후 등 다방면에 걸친 전문 연구서가 줄을 잇는다.

저자는 이 책 출간을 기념해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10월8~13일 서울 일민문화관(옛 동아일보사 사옥)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의 제목은 ‘서양인이 본 조선-조선관계 서양서지 출간 기념 도서전’으로, 이 책에 소개된 원전들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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