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논쟁' 돌아본 전국역사학대회 현장 중계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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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역사학대회/한·중·일 ‘국사’ 의식 등 비판적 검토
올해 국내 역사학계의 화두는 단연 고구려사 논쟁이다. 5월28~29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제47회 전국역사학대회의 주제는 ‘세계화 시대의 역사 분쟁’. 역사학회(회장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매년 주최하는 전국역사학대회는 한국사와 동·서양사 연구자들이 대거 참가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역사학 관련 학술 행사이다.

이번 대회는 지금까지 한국사 전공자들만의 ‘성토장’으로 끝나곤 했던 고구려사 관련 학술대회와 달리 중국의 동북공정 이래 촉발된 한·중 간의 이른바 ‘역사 전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재조명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함께 최근 국내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고구려 역사 지키기’ 움직임도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예정이다.

현재 고구려사를 둘러싸고 한·중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는 크게 다음 네 가지 정도. 첫째, 고구려 종족은 한민족을 형성한 종족인가, 아니면 중국의 고대 소수민족인가. 둘째, 책봉-조공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다시 말해 고구려는 독립 국가였나, 아니면 중원 왕조의 지방 정권이었나. 셋째, 통일신라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가. 넷째, 고조선의 영역과 한(漢) 군현의 역사적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올해 대회에서 첫 번째 주제 논문으로 ‘동북아시아사에 대한 한·중간 역사 인식의 차이’를 발표하는 임기환 교수(한신대 학술원·한국사)에 따르면, 이런 논쟁은 역사 실증의 문제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구려사를 각각의 ‘국사’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두 나라의 주장에는 많은 내면의 동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임교수는 그 사례로 중국은 최근 남북한 ‘고구려 붐’이 동북 만주 지역에 대한 ‘고토 회복’ 의식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으며, 한국은 한국대로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의도가 한반도 북부지역(현 북한)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든다. 임교수를 비롯한 이번 대회의 발표자들은 이른바 역사 전쟁의 ‘전범’으로 양국의 민족주의 사관을 지목한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추상적이다 보니 해결 전망 또한 난망이다. 특히 한국과 중국은 ‘민족’의 개념을 놓고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중국에서 ‘중화 민족’은 한족을 비롯한 56개 민족이 융합된 정치적 개념으로 쓰이는 말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민족을 혈통적·역사적 개념으로만 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민족’ 개념으로 인해 민족을 기준으로 하는 두 나라의 역사적 범주는 중첩될 수밖에 없고, 역사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경우 ‘역사 전쟁’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다고 발표자들은 지적한다.

임기환 교수는 “그러한 차이를 충돌이 아닌 화해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 모두 동아시아사와 자국사를 교차하는 역사 인식이 필요하며, 고대사를 현재가 아닌 당대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안상준 교수(안동대·서양사)는 유럽의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논문(‘민족사의 시원과 민족 영웅의 국적’)에서 “민족주의 역사 서술은 근대의 개념들을 무차별적으로 먼 과거로 투영시켜 민족사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라고 비판한다. 송상헌 교수(공주교대)는 ‘교육 현장에서 역사분쟁의 처리 방향’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공유된 역사를 ‘협의’하기 위한 시민 사회의 움직임이나 학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한다.
민족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 작업은 올해 대회의 자유 패널 토론 주제로 선정된 ‘민족주의 사관 재검토’ 시간에 더욱 심층적으로 다루어질 계획이다. 임지현 교수(한양대·서양사)는 미리 배포한 ‘국사의 대연쇄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발표 논문에서 한·중 혹은 한·중·일 간에 벌어지고 있는 고대사 논쟁은 실증 분석보다 근대적 정치 지형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갈피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하면서 동시에 살찌우고 강화시켰던, 적대적이면서 공범자적인 관계다. 각국의 ‘국사’는 그런 적대적 공범 관계를 떠받치는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축이다”라는 것이다.

임교수가 제시한 대안은 ‘한·중·일 역사학자들이 국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동아시아 패러다임을 찾는 데 함께 노력하자’는 것이다. 남북한의 민족주의 역사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예정인 정두희 교수(서강대·한국사)도 “역사학이 역사학자 자신의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주어진 당위성에 토대를 두고 있을 때 그보다 더 큰 위험은 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회장을 맡은 이태진 교수는 국가주의가 부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면서, “한·중·일 학계가 자국 중심의 역사 연구를 넘어 동북아시아와 세계사적 시각을 확보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토대로 3국이 함께 모여 각국의 입장을 비교해 점차 공감대를 형성해 가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국역사학대회에서는 이밖에도 한국사·동양사·서양사·고고학·과학사 등 15개 분과 학회 별로 토론회가 열리고, 논문 70여 편이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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