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에 맞선 창작 뮤지컬 지킴이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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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8인이 밝히는 ‘탈 브로드웨이’ 승부수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캣츠>에 이어 <맘마미아>까지, 대형 수입 뮤지컬의 성공 신화가 이어지고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100여일 동안 독식했던 <맘마미아>는 10만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모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올 여름에는 내한하는 <카바레>를 비롯해 <미녀와 야수> <42번가> <지킬 앤드 하이드>가 한판 승부를 벌일 예정이다.

이런 대형 수입 뮤지컬의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들이 있다. 바로 창작 뮤지컬 제작자들이다. 창작 뮤지컬 제작자들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일본처럼 뮤지컬 시장이 양극화하는 것이다. 일본 뮤지컬 시장은 대형 수입 뮤지컬에 주로 의존하다가 문화적인 자생력을 상실했다. 사계나 동보 등 수입 뮤지컬을 주로 공연하는 제작사들이 메이저가 되면서 대형 수입 뮤지컬 제작사와 소형 창작 뮤지컬 제작사로 양분되었다.

대형 수입 뮤지컬이 범람하는 데다 경기 불황이라는 복병까지 만난 창작 뮤지컬 제작자들은 올 여름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다. <시사저널>은 대형 수입 뮤지컬의 폭격 속에서 창작의 고뇌와 수익 창출의 고충으로 겹고생을 하고 있는 창작 뮤지컬 제작자 여덟 사람을 만나보았다.
“대형 무대로 수입 뮤지컬 파도 넘겠다”
김용현 (서울뮤지컬컴퍼니 대표)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제작한 서울뮤지컬컴퍼니 김용현 대표는 대표적인 창작 뮤지컬 전문 제작자다. 올 봄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각색한 동명의 뮤지컬로 <맘마미아>에 맞불을 놓았던 그는 올 여름 다시 디즈니 뮤지컬 <미녀와 야수>에 정면으로 맞선다.

충분한 사전 제작 기간 없이 급하게 무대에 올렸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평단의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았다. 1970~1980년대 한국 대중 음악의 음악적 성취를 뮤지컬 무대로 재현한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들었지만, 조악한 무대와 밋밋한 스토리 전개로 비난도 받았다.

다소간 손실을 보았지만 김대표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대형 수입 뮤지컬과 경쟁하기 위해 체중을 불린 것이다. 그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덩지를 키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린다. 이는 최초의 창작 대형 뮤지컬인 <명성황후>의 성공 사례를 따른 것으로 ‘창작 뮤지컬은 고만고만하다’는 뮤지컬 관객의 선입견을 깨기 위한 전략이다.

불황에 투자자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지만 그는 성공을 자신했다. 그는 “우리는 늘 위기였다. 한번도 쉽게 작품을 올려본 적이 없다. 작품을 올릴 무대가 있는 한 희망은 있다”라고 말했다.
“제대로 만들면 제대로 보상받는다”
최철기 (뮤지컬 <점프> 기획자)

무협 가족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뮤지컬로 제작한 <점프>는 <난타> 이후 가장 주목되고 있는 넌버벌 퍼포먼스 프로젝트다. 2002년 말 <별난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시범 공연되었던 <점프>는 지난해 여름 초연된 이래 2백50여회 공연을 통해 꾸준히 내공을 쌓아가고 있다.

무협 퍼포먼스라는 독특한 장르에 속하는 <점프>는 전형적인 기획 공연이다. 이 작품은 최철기씨가 1999년부터 기획해온 것으로 태권도가 모티브가 되었다. 태권도가 종주국인 한국에서보다 미국에서 성공한 이유가 마케팅이라고 분석한 그는, 연간 1조원 규모의 시장을 겨냥해 태권도 공연을 기획했다.

태권도를 공연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는 체계적인 준비 단계를 거쳤다. ‘제대로 만들면 제대로 보상 받는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위해 배우들을 뽑아서 2년 동안 무술과 아크로바트 체조를 기초부터 가르쳤다. 몸을 이용한 연기도 따로 지도했다. 그는 “무대 위의 배우는 관객이 카리스마를 느낄 만큼 보여줄 것이 많아야 한다.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야 관객은 인정한다”라고 말했다.

“스크린쿼터처럼 스테이지쿼터가 있어야”
진광엽 (퓨전 퍼포먼스 <천적지악마> 제작자)

퓨전 퍼포먼스 <천적지악마> 제작자인 스타우드 진광엽 대표는 현직 변호사다. 조금 더 거슬러올라가보면 얼마 전까지 판사였다. 판사가 뮤지컬 기획사 대표가 된 것은 연극배우협회 고문 변호사를 맡고서 뮤지컬 마니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엔터테인먼트 경영자 과정까지 거쳤지만 그가 뮤지컬계에 투신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수한 공연 인력에게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는 “경영자로서 나의 목표는 이익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손해를 보지 않는 정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작품 만들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천적지악마>는 지난 월드컵 때 거리를 달구었던 ‘붉은 악마’의 열정과 에너지를 무대 위에 올린 작품으로, ‘천적지악마’란 ‘하늘은 붉고 땅에는 즐거운 악마가 가득하다’는 의미이다. 이 작품을 위해 그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판사 교수 등을 투자자로 참여시켰다. 그는 “스크린쿼터처럼 스테이지쿼터가 있어야 한다. 창작 뮤지컬 제작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작품을 올릴 무대이다”라고 말했다.
“창작은 끝없는 버티기다”
정성한 (개그맨·뮤지컬 <펑키펑키> 제작자)

최근 공연계에 나타난 흥미로운 양상 중 하나는 바로 뮤지컬 제작자로 나서는 개그맨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개그맨 백재현씨가 <루나틱>을 제작한 것을 비롯해 정성한씨가 <펑키펑키>를, 서승만씨가 <터널>을 제작했다. 특히 뮤지컬쇼 형식의 <펑키펑키>를 제작한 정성한씨는 뮤지컬 전용 극장까지 지어 공연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펑키펑키>는 <춘향전>을 각색한 사랑 이야기로 현대판 퓨전 마당놀이 격의 뮤지컬쇼이다. 사재를 털어 전용 극장 펑키하우스를 지은 그는 방송 출연까지 그만두고 <펑키펑키>에 ‘올인’했다. 기존 뮤지컬과 다른 새로운 형식을 선보였지만 평단으로부터 그다지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한 공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직원도 무대도 출연 배우 숫자도 모두 줄였지만, 막은 내리지 않았다. 그는 “비싼 수업료를 치렀지만 조금씩 수정하면서라도 끝까지 갈 생각이다. 창작은 버티기다. 계속 공연을 굴려 가야 언젠가 인정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 뮤지컬의 미래를 노래한다”
송시현 (가수·뮤지컬 전문 작곡가)

창작 뮤지컬 제작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작품에 맞는 적절한 뮤지컬 전문 작곡가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흡인력 있는 멜로디 라인을 뽑아낼 수 있는 작곡가가 드물어 애를 먹고 있다. 가수 이선희씨가 부른 히트곡 <한바탕 웃음으로>와 <나 항상 그대를>을 작곡한 송시현씨는 몇 안 되는 뮤지컬 전문 작곡가이다.

대중 가요 작곡가인 그가 뮤지컬 전문 작곡가로 나선 것은 뮤지컬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이다. 작곡가로서 그의 마지막 목표는 뮤지컬 작곡가였다.

2001년 어린이 뮤지컬 <알라딘의 요술 램프> 음악을 맡은 이후로 그는 뮤지컬 열두 작품에서 작곡을 맡았는데, 창작 뮤지컬 <터널>과 <청년 장준하>에서도 음악을 맡았다. 그는 “뮤지컬 전문 작곡가가 드문 것은 들인 노력에 비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 미래에 모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뮤지컬로 한류 일으킨다”
김우정 (<더 플레이 엑스> 마케팅 실장)

인터넷 게임을 소재로 한 뮤지컬 <더 플레이 엑스>는 대표적인 ‘창작 뮤지컬 성장주’이다. 1999년 7월 대학로 소극장에서 초연된 이래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오마이 갓스>라는 이름에서 <갓스> <더 플레이> <더 플레이 엑스>로 이름을 바꾸면서 끝없이 업그레이드되었다.

<더 플레이 엑스>는 창작 뮤지컬로는 드물게 마케팅에 성공한 작품이다. <더 플레이 엑스>의 마케팅팀은 관객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나섰다. 길거리 공연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홍보했던 <더 플레이 엑스> 마케팅팀은 올 봄에는 고려대 등 서울 시내 8개 대학 축제에 야외 공연을 통해 작품을 홍보했다.

끝없이 변신하는 <더 플레이 엑스>는 맞춤형 공연을 지향한다. 올 여름 공연분은 뮤지컬의 주요 소비 계층인 20대 후반 직장 여성의 입맛에 맞게끔 수정했다. 다음 버전은 해외 공연용이다. 김우정 마케팅 실장은 “한국 뮤지컬의 전성기가 그리 멀지 않은 날에 올 것이다. 뮤지컬로도 한류 열풍을 일으키겠다”라고 말했다.

“브로드웨이가 우리를 모셔갈 날 온다”
양정웅 (극단 여행자 대표)

최근 뮤지컬계에 나타나는 양상 중의 하나는 <지하철 1호선>처럼 외국 원작을 각색해 뮤지컬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특히 셰익스피어 희극 <한여름 밤의 꿈>은 여러 극단에서 뮤지컬로 각색했다.

여러 가지 버전의 <한여름 밤의 꿈>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극단 여행자의 작품이다. 여행자의 <한여름 밤의 꿈>은 원작에서 스토리를 빌린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을 한국화했다. 한복을 입은 선남선녀가 얽히고 설킨 애정 행각의 주인공이 되었고, 소동을 일으키는 주범인 요정은 도깨비가 되었다.

봉산탈춤·택견·각설이타령 등 고리타분할 것 같은 우리의 전통 문화가 죄다 들어가 있지만 <한여름 밤의 꿈>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전통의 장점만 요소요소에서 뽑아내 패스트푸드처럼 간결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전통에서 보편성과 현대성을 찾아낸 <한여름 밤의 꿈>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주목되고 있다. 일본·이집트·폴란드 등에서 공연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동양의 문화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브로드웨이에서 우리를 부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 전에 먼저 셰익스피어 전용 극장인 영국의 글로브 극장에서 공연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최후에 웃을 자는 창작 뮤지컬이다”
최영환 (제미로 제작본부장)

국내 공연계에서 제미로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2001년 블록버스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수입해 성공시킴으로써 제미로는 한국 뮤지컬의 역사를 다시 썼다. <오페라의 유령>이 성공해 한국 뮤지컬 시장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킨 제미로는 이후 <캣츠> <시카고> <킹 앤드 아이>가 연속 성공해 대형 공연기획사로서 입지를 굳혔다.

뮤지컬 수입으로 공연계 지존의 위치에 올랐지만 제미로는 미래의 비전을 뮤지컬 수입에만 두지 않는다. 영화와 게임처럼 뮤지컬도 국산 콘텐츠가 해외 콘텐츠를 대체할 날이 온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제미로는 2007년쯤에 이르면 수입 뮤지컬의 기세가 꺾이고 창작 뮤지컬이 주도권을 확보할 것으로 보고 이에 맞추어 블록버스터 창작 뮤지컬을 기획하고 있다. 제미로의 창작 뮤지컬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는 최영환 제작본부장은 “단순한 면피용이 아니다. 기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지금은 누가 어떤 뮤지컬을 수입하느냐가 승부수지만 결국 대형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 기획사가 평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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